항목 ID | GC0490166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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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洙暎 |
분야 | 역사/근현대,구비 전승·언어·문학/문학,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예술인 |
지역 | 서울특별시 도봉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이명찬 |
출생 시기/일시 | 1921년 11월 27일 - 김수영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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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시기/일시 | 1928년 - 김수영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35년 - 김수영 선린 상업 학교 전수부 입학 |
수학 시기/일시 | 1938년 - 김수영 선린 상업 학교 본과 진학 |
수학 시기/일시 | 1942년 - 김수영 선린 상업 학교 졸업 |
활동 시기/일시 | 1942년 - 김수영 일본 도쿄로 건너가 연극을 공부 |
활동 시기/일시 | 1944년 - 김수영 중국 만주 길림성으로 가 연극을 함 |
활동 시기/일시 | 1945년 - 김수영 「묘정의 노래」 발표 |
수학 시기/일시 | 1946년 - 김수영 연희 전문학교 영문과 입학 및 중퇴 |
활동 시기/일시 | 1949년 - 김수영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 간행에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950년~1953년 - 김수영 6·25 전쟁 당시 포로수용소 생활 |
활동 시기/일시 | 1955년 - 김수영 마포구 구수동으로 이사 |
활동 시기/일시 | 1958년 - 김수영 제1회 한국 시인 협회상 수상 |
몰년 시기/일시 | 1968년 6월 16일 - 김수영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969년 6월 15일 - 김수영 시비 건립 |
추모 시기/일시 | 1981년 9월 - 김수영 『김수영 전집』 출간 |
추모 시기/일시 | 1981년 11월 27일 - 김수영 ‘김수영 문학상’ 제정 |
추모 시기/일시 | 2001년 10월 20일 - 김수영 금관 문화 훈장 추서 |
특기 사항 시기/일시 | 2013년 - 김수영 ‘김수영 문학관’ 건립 중 |
출생지 | 김수영 출생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158 |
거주|이주지 | 김수영 거주지 - 서울특별시 마포구 구수동 |
학교|수학지 | 선린 상업 학교 - 서울특별시 용산구 원효로 97길 33-4[청파동 3가 131-2] |
묘소 | 김수영 시비 -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북한산 국립 공원 도봉 서원 앞(동경 127.030365, 북위 37.687046) |
성격 | 시인 |
성별 | 남 |
본관 | 김해 |
[정의]
서울특별시 도봉구에 묘소가 있는 현대 시인.
[개설]
시인 김수영(金洙暎)[1921~1968]은 등단 초기에는 다소 난해하고 실험적인 언어를 구사하다가 6·25 전쟁을 지나며, 자신의 기교에 현실 참여적 태도를 지양하여 종합한 빼어난 시들을 잇달아 발표함으로써 1960년대 대표적 시인으로 자리 잡았다. 1950년대 중반부터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소재 본가를 왕래하며 시작에 몰두하였으며, 사후에도 도봉동 본가 옆에 안장되었다.
[활동 사항]
김수영은 1921년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158번지에서 500석 지기 무관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이내 가세가 기울고 시대의 격변이 뒤따르면서 생애 내내 여러 곳을 옮겨 다녔다. 어의동 공립 보통학교[현 효제 초등학교]를 졸업하는 해에 장질부사 합병증으로 고생하는 바람에 어렵게 선린 상업 학교로 진학하여 1942년에야 졸업하였다. 그 후 일본 도쿄로 건너가 잠깐 연극을 공부하였고, 해방 전 해에는 조선 학병 징집을 피해 가족이 옮겨간 중국 만주 길림성으로 건너가 역시 연극에 매진하였다.
해방 후에 귀국하여 연극을 버리고 시인으로 등단한 뒤에 1968년 귀가 길에 집 앞에서 좌석버스에 치여 생을 마감하기까지 김수영은 당대 문단을 주도하는 시인이자 번역가, 산문가로서의 삶을 치열하게 살았다. 6·25 전쟁이 발발하자 북한 의용군으로 징집되어 북으로 끌려갔다가 탈출하였지만 경찰에 붙들려 1953년까지 포로수용소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김수영 시인은 1954년 가족과 재회한 후 서울특별시 중구 신당동에서 살다가 1955년 6월 마포구 구수동으로 분가하여 번역과 양계 일로 생업을 삼았다.
이 무렵 어머니를 비롯한 나머지 가족들은 도봉구 도봉동 산107-2번지[도봉구 시루봉로 23나길 36-11번지] 선영 근처로 이주하여 살았다. 이 시기 시인은 본가에도 계사를 만들어 관리하는 등 수시로 도봉동 본가를 찾으면서 작품 활동을 하였다. 현재 그가 태어난 관철동 집, 어린 시절 살았던 종로 6가 집, 구수동 집 등은 재개발로 남아있는 곳이 없는 상태이다. 따라서 도봉동 본가 자리만이 시인의 체취를 느낄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되었다.
[저술 및 작품]
1945년에 「묘정의 노래」[『예술 부락』]로 등단하였고, 1949년에 신시론 동인지 『새로운 도시와 시민들의 합창』에 참여하였다. 1957년에 합동 시집 『평화에의 증언』에 참여하였고, 1959년에 생전의 유일한 시집인 『달나라의 장난』을 간행하고 ‘한국 시인 협회상’을 받았다. 1968년 1월에 『사상계』에 산문 「지식인의 사회 참여」를 발표하였다. 사후인 1974년에 시선집 『거대한 뿌리』, 1975년에 산문 선집 『시여, 침을 뱉어라』, 1976년에 시집 『달의 행로를 밟을지라도』와 산문집 『퓨리턴의 초상』이 간행되었다. 1981년에는 민음사가 주관하여 그의 전집을 두 권으로 간행하였고, 이를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도 제정되었다.
[묘소]
김수영의 묘는 처음에 서울특별시 도봉구 도봉동 산 107-2번지[도봉구 시루봉로 23나길 36-11번지] 선영 근처에 있었는데, 1991년 4월 어머니의 죽음과 함께 유족들이 합의하여 파묘하였다. 시신은 화장한 후에 습골하여, 북한산 국립 공원 지역 내 도봉 서원 앞으로 시비(詩碑)를 이건할 때에 그 아래 묻었다. 따라서 현재는 그의 시비가 곧 묘소인 셈이다.
[상훈과 추모]
김수영이 죽은 이후에 그를 기리는 많은 평론가와 출판사들이 나서서 다양한 선집과 전집을 잇달아 간행하였다. 특히 민음사는 전집 출간을 계기로 ‘김수영 문학상’을 제정하고, 김수영이 태어난 날인 11월 27일에 제1회 ‘김수영 문학상’ 시상식을 열었다. 1981년의 제1회 수상자는 『저문 강에 삽을 씻고』의 정희성 시인이었다. 2001년 9월에는 시인 최하림이 『김수영 평전』을 출간하였고, 10월 20일에는 국가가 김수영의 문학 활동을 기려 금관 문화 훈장이 추서되었다. 2013년 11월 27일 서울특별시 도봉구 방학동에 ‘김수영 문학관’이 개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