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지도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8200525
한자 輿地圖書
분야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유형 문헌/전적
지역 서울특별시 동작구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주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저술 시기/일시 1757연표보기~1765년연표보기 - 『여지도서』 저술
성격 지리지
간행자 영조
권책 55책 필사본

[정의]

서울특별시 동작구의 인문지리적 정보를 포함하는 1760년대에 제작된 지방 읍지.

[개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년(영조 33)부터 1765년(영조 41) 각 군현에서 편찬된 읍지(邑誌)를 합해 엮은 전국 읍지이다. 총 55책으로 313개 군현의 읍지가 수록되었다.

[저자]

『여지도서』는 각 군현에서 편찬한 읍지를 묶어서 편차(編次)하였으므로 별도의 저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편찬/간행 경위]

『영조실록(英祖實錄)』에 의하면 1757년 8월 9일 홍문관 수찬 홍양한(洪良漢)은 『팔도분도첩(八道分圖帖)』을 영조에게 소개하고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이 간행된지 오래되어 변화된 실상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하므로 각 도의 읍지를 올려 보낼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가 윤허하였고 『여지도서』 편찬 사업이 시작되었다.

실록 기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17세기 중엽 이후 사회 질서가 정비되면서 당시 조정에서는 각 지방 사회를 정확히 파악해야 할 필요성을 절감하였으며 이에 따라 지방 통치에 활용할 기초 자료로서 『여지도서』와 같은 읍지를 제작하였다.

[형태/서지]

『여지도서』는 총 55책으로 구성된 필사본으로 각 읍의 채색 지도가 포함되어 있으며,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1개의 진지(鎭誌)를 포함하여 모두 313개의 읍지가 수록되어 있다.

2020년 현재 한국 교회사 연구소에 소장되어 있다.

[구성/내용]

『여지도서』에는 당시 지도·도로망·방리 등의 지리와 호구·건치연혁·고을 이름 등의 행정구역, 성곽·관직·산천·성씨·풍속 등의 인문지리, 궁실·학교·사당·관공서·제언(堤堰)·창고·역원·교량·봉수·누정·사찰 등의 명승과 고적, 명신·충신·효자·열녀 등의 인물, 논밭·진상품·각종 세금·관리 녹봉·군사 숫자 등의 경제적 수치에 관한 기록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여지도서』에 의하면 동작구 일대인 당시의 과천현(果川縣)은 6품의 현감 아래에 좌수(座首)와 별감(別監)을 각 1명씩 두었으며, 군관(軍官) 15명, 아전(衙前) 19명이 소속되었다. 좌수와 별감의 경우, 그 운영의 실제는 지역과 시대에 따라 차이가 있으나 현에는 2명을 두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 임무는 수령의 자문에 응하고 풍기를 단속하며, 향리를 규찰하는 등 수령을 보좌하는 것이었다. 지방 양반 중에서 나이가 많고 덕망이 있는 자를 추대하여 우두머리를 좌수, 차석을 별감이라 하여 수령이 임명하였고 대개 2년의 임기를 수행하였다. 군관은 군사적인 실무를 담당하였고, 아전은 지방 관청의 하급 행정실무자로 이·호·예·병·형·공의 6방 등의 업무를 담당하였다. 한편 『여지도서』에 의하면 또 다른 동작구 지역인 당시의 금천현(衿川縣)은 가호수가 1,873호에 인구는 7,763명이고 행정구역은 6개면 39개 동리로 구성되었다. 금천현은 현감 아래에 좌수 1명, 별감 2명, 군관 15명, 아전 22명이 소속되었다.

[의의와 평가]

조선 후기 각 지방의 지리적 특징을 비교적 상세하게 기록해 놓은 『여지도서』는 조선 후기 인문지리지의 대표작이며 이후 여러 지리지를 편찬하는 데에 중요한 기준으로 이용되었다. 이후에 편찬된 『경기지(京畿誌)』, 『경기읍지(京畿邑誌)』 등에서 『여지도서』의 기본적 체계를 따르고 있어 『여지도서』의 영향력을 파악할 수 있다.

또한 『여지도서』에는 방리·제언·도로·전세·군병 등의 항목이 더해져 조선 후기 각 군현의 사회적·경제적 내용이 보강되었으며 각 읍지의 도입부에 해당 군현의 대축척 지도를 첨부하여 18세기 중엽 지방 사회의 실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로서 활용되고 있다.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https://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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