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10225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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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咸興差使朴淳逸話 |
영어의미역 | The Tale of Lost Messenger Bak Sun |
분야 | 구비 전승·언어·문학/구비 전승 |
유형 | 작품/설화 |
지역 |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이상희 |
[정의]
충청북도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함흥차사’와 관련하여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
[개설]
「함흥차사 박순 일화」는 조선 초기 태조에게 문안사로 갔다가 안타깝게 죽은 박순(朴淳)의 일화이다.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 오리골에 박순의 충신문과 부인 장흥임씨의 열녀문이 있다.
[채록/수집상황]
음성군 대소면 오류리에서 채록하여, 1982년에 출간한 『내고장 전통가꾸기-음성군-』에 수록하였다. 그후 2005년과 2008년에 출간한 『음성의 구비문학』과 『음성군지』 등의 책자에 수록되어 전한다.
[내용]
조선을 세운 태조는, 태종이 여러 명의 왕자를 죽이고 왕위에 오르자 옥새를 들고 고향인 함흥으로 가서 한양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에 태종은 아홉 번이나 함흥으로 신하들을 보내어 환궁할 것을 탄원했지만, 태조는 함흥으로 오는 신하들을 모두 죽여서 죽음의 사자로 만들어 버렸다. 이렇게 되자 함흥으로 가겠다는 신하가 아무도 없었는데, 어느 날 박순이 태종 앞에 나아가 함흥차사를 자청하였다.
박순은 1388년(고려 우왕 14)의 요동정벌 때 이성계의 휘하에서 종군하는 등 이성계와는 전쟁터에서 이승과 저승을 초월한 전우이자 친구였다. 그리하여 1402년(태종 2) 박순은 태조를 모셔 오기 위해 함흥으로 떠났는데, 보통 사신의 행차 때 타고 가는 가마도 타지 않고 하인도 없이, 오직 새끼가 달린 어미 말 한 필만을 타고 갔다. 이윽고 태조가 머물고 있는 함흥의 행재소(별궁) 앞까지 온 박순은, 강가의 나무에 망아지를 매어놓고는 어미 말을 끌고 행재소 안으로 들어갔다.
박순이 사신으로 오자, 태조는 오랜 벗을 대하듯 즐거워하며 박순을 맞이하였다. 그리하여 즐겁고 기쁜 마음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데, 밖에서 새끼 말이 어미를 찾느라 시끄럽게 울부짖자 태조가, “허, 아까부터 말 울음소리가 요란하니 괴이하구나. 여봐라! 밖이 왜 이리 소란한지 가서 알아오너라.” 하고 말하였다.
박순은 기다렸다는 듯, “전하! 주의를 시끄럽게 해드려 황송합니다. 저 말 또한 신이 데리고 온 것인데, 아직 새끼인지라 방해가 될까 염려하여 행재소 밖에 묶어놨더니 어미를 찾느라 저리도 울부짖는 모양입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그러면서, “아무리 하찮은 축생이라도 지친(至親: 어버이)의 정은 떼지 못하는가 보옵니다.” 하고 말하니 태조의 낯빛이 조금 변하는 듯싶었다.
이때다 싶어서 박순은, “전하, 저같이 말 못하는 하찮은 짐승도 어미와 새끼가 서로 그리운 정을 참을 수 없어 하는데, 서울에 계신 전하께서 어찌 상왕의 용안을 대하고 싶은 어의가 간절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간곡히 말하였다. 태조는 박순의 말에 감동이 되었는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며칠 놀다 가라며 붙잡았다.
그 후 며칠 뒤였다. 박순과 태조가 장기를 두고 있는데, 갑자기 처마 끝에서 새끼 쥐와 어미 쥐가 툭, 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미 쥐는 바닥으로 떨어질 때 몹시 다친 듯 움직임이 시원찮았으나, 혹시나 새끼나 잘못되지는 않을까 염려하여 새끼를 놓지 않았다. 이것을 본 박순은, 태조를 모시는 무사들이 쥐를 죽이려고 달려들자 죽이지 못하도록 말리면서 태조 앞에 엎드렸다.
“웬일인고?” 하고 태조가 의아해서 묻자 박순은, “황공하옵니다. 전하! 맞아죽을 줄 알면서도 새끼를 두고 도망가지 못하는 어미 쥐의 정경이 몹시 가련하고 갸륵해서이옵니다. 더욱이 어전 앞인지라 하찮은 미물일망정 살생은 금해야겠기에…….” 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부자의 정을 탄원하고 한양으로 환궁하기를 빌었다.
일이 이렇게 되자 태조도 크게 감동하여, “내 수일 안에 한양으로 갈 터이니, 걱정 말고 가서 내 뜻을 전하여라. 아직 감정이 격한 몇몇 신하들을 달래어 내 뒤를 따르마.” 하고 은밀히 환궁의 뜻을 말하였다. 박순은 태조의 낯빛을 보고 비로소 안심한 뒤, 하직인사를 올리고 기쁜 마음으로 한양길을 재촉하였다. 그리하여 홀가분한 마음으로 산천의 아름다움을 감상하며 걸으니 하루 지나 이틀이 되었는데 백 리도 걷지 못하였다.
한편 행재소에서는, 태조가 한양에서 오는 사신은 무조건 죽여서 돌려보내지 못하도록 내린 엄명을 거두고 박순을 살려 보내자 신하들이 크게 반발하였다. 태조가 한양으로 돌아가면 태종이 자신들을 가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판단한 신하들은 지금이라도 박순을 죽여서 한양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태조를 공박하였다. 태조는 할 수 없이 하루 이틀 시일을 늦추면서 박순을 살릴 궁리를 하였다.
그리하여 사흘째 되는 날, ‘아무리 못 갔어도 이백 리 길은 갔을 테지.’ 하고는 신하들에게, “너희들이 뜻이 정 그렇다면 할 수 없구나. 만약 용흥강을 건넜으면 놓아주고 못 건넜거든 베어라.” 하고 말했다. 신하들은 날랜 군사들을 보내 박순의 뒤를 쫓았다. 함흥에서 영흥(용흥강)까지는 백 리도 채 못 되는 거리였으나, 박순은 태조의 예상과는 달리 안도감에 천천히 걷느라 그 때까지 용흥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다.
그리하여 이제 막 나룻배에 올라서 배가 움직이려고 할 즈음, 먼발치에서 한 때의 군사들이 말을 달려오며 “멈추시오! 어명이니 멈추시오!” 하고 소리를 질렀다. 박순은 어명이라는 소리에 배를 띄우지 않고 기다렸다. 그러자 군사들이 서둘러 다가와, “어명이오!” 하고는 칼로 박순의 허리를 베니, 시체의 반은 나룻배 안에, 나머지 반은 강물에 떨어졌다.
박순의 죽음은 함흥의 행재소뿐 아니라 한양의 조정에서도 큰 충격을 불러일으켰다. 넉넉히 살아서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태조는 대경실색하여 신하들에게, “그래, 죽음에 임하여 무슨 말이 없더냐?” 하고 물었다. 그러자 신하 중 한 명이, “ 행재소가 있는 곳을 향하여 흐느껴 울면서 말하기를, 나 하나 죽는 것은 조금도 아깝지 않으나, 원하옵건데 이미 약속하신 회필(환궁)의 뜻은 추호도 고치지 마시옵소서. 하고 말했나이다.” 하였다.
태조는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박공은 짐의 좋은 친구이다. 아, 오늘 그가 죽다니! 내가 마침내 전일에 그가 한 말을 저버리지 않으리라.” 하였다. 그리고 박순의 시체를 잘 수습하여 장례를 치르도록 하고는 한양으로 환궁하였다. 한편 태종도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살신성인의 충정에 감동하여 공신으로 봉하고 벼슬을 높여 주었다. 또한 박순의 소식을 듣고 자결한 부인 장흥임씨에게도 묘지를 하사하고 정경부인으로 추증하였다.
[모티프 분석]
「함흥차사 박순 일화」는 지친(至親)의 정으로써 태조의 마음을 설득하고, 죽으면서까지 태조의 환궁을 바라는 박순의 이야기이다. ‘함흥차사’의 유래가 담긴 실화가 민간에서 전해 오다 설화로 굳어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