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3006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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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古地圖 |
영어음역 | gojido |
영어의미역 | ancient map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강원도 강릉시 |
집필자 | 정암 |
[정의]
작성 연대가 오래되고, 지도 제작의 기술사적인 면에서 현대 지도와 구별되는 지도.
[개설]
고지도는 지도에 수록되는 지역의 규모에 따라 세계지도, 천하지도, 전국지도, 지방지도, 군현지도[읍지도], 관방지도로 분류할 수 있다. 여기서는 이들 중에서도 전국지도와 군현지도에 한정시켜 다룰 것이다. 전국지도는 한 장의 종이에 넓은 지역이 취급되어 있기 때문에 군현지도에 비해서 생활공간의 내용이 적게 수록되어 있다. 그렇지만 다른 전국지도에 비해서 『청구도』·『동여도』·『대동여지도』는 내용이 많이 수록되어 있는 편이다.
[내용]
전국지도에 비하여 군현지도는 조선시대 행정구역의 기본단위였던 부목군현(府牧郡縣)의 생활공간을 다루고 있다. 여기에는 지방관청인 관아가 중심에 위치하고, 주변에는 백성들이 모여 사는 촌락과 경지가 펼쳐져 있다. 읍치 중심에는 관아 외에도 향교와 같은 교육기관과 생활물자가 거래되는 장시도 형성된다. 농업생산 활동은 촌락에서 이루어지고 행정업무나 장시를 통한 물자 교환은 읍내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군현지도에는 이러한 고을의 모습이 꽤 상세하게 그려져 있다.
강릉부를 그린 군현지도는 제책의 형태에 따라 ‘낱장으로 된 지도’, ‘첩으로 된 지도’, ‘지리지에 포함된 지도’로 나눌 수 있다. 낱장으로 된 지도에는 「1872년 군현지도」, 첩으로 된 지도에는 『해동지도』, 『여지도』[규장각], 『여지도』[국립중앙도서관], 『여지편람』, 『지승』, 『각읍지도』, 『광여도』, 『조선지도』, 『팔도지도』, 『해동여지도』 등이 있다. 지리지에 포함된 지도에는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강릉부지도』, 『관동지』의 『강릉부지도』, 『관동읍지』의 『강릉부지도』가 있다.
첩으로 된 지도는 방안[또는 경위선]의 유무에 따라 다시 두 유형으로 나눌 수 있다. 첫째 유형은 방안을 사용하지 않은 지도이다. 이들 지도는 산줄기를 중심으로 그리면서도 공간의 중요도에 따라 축척을 달리하고 있다. 『해동지도』, 『여지도』, 『여지도』, 『여지편람』, 『지승』, 『광여도』, 『각읍지도』가 여기에 속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들 지도를 『해동지도』 계열이라고 해 두자. 둘째는 지도에 방안을 사용한 지도이다. 축적이 전 지역에 걸쳐서 동일하기 때문에 땅의 윤곽이 현대 지도와 비슷하다. 『조선지도』, 『지도』, 『팔도지도』, 『해동여지도』가 여기에 속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들 지도를 『조선지도』 계열이라고 해두자.
『해동지도』 계열은 산지가 줄기로 묘사되어 있으며 크고 작은 것을 구분하고 있다. 읍치는 외곽 지역보다 확대시켜 상세하게 그렸다. 도로가 매우 자세하게 표현된 것도 돋보인다. 그렇지만 땅의 전체적인 윤곽은 매우 왜곡되어 있다. 이에 비해서 『조선지도』 계열의 특징은 지도가 방안 위에 그려져 있는 점이다. 따라서 땅의 전체적 윤곽은 현대 지도와 흡사하며, 특정 사상(事象)이 다른 사상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확대되어 있지 않다. 산줄기는 크고 작음을 구분하지는 않았지만, 그 방향성이 매우 또렷하다. 도로는 읍치를 중심으로 한 남북로와 대관령을 넘어서 운교역에 이르는 간선만 그려져 있다.
이하에서는 전국지도 중 일반에게 잘 알려져 있는 『대동여지도』, 낱장으로 된 「1872년 군현지도」, 지도첩으로 된 지도 중 경위선이 없는 『해동지도』 계열의 『해동지도』, 경위선이 있는 『조선지도』 계열의 『조선지도』, 지리지에 포함된 지도 중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강릉부 지도, 『관동읍지』의 강릉부 지도를 대상으로 하여 해제와 내용상의 특징을 간략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강릉부 고지도의 해제 및 묘사의 특성]
1. 전국지도인 『대동여지도』 중 강릉부
『대동여지도』는 고산자 김정호가 『청구도』와 『동여도』의 내용에 입각해서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1861년(철종 12)에 만든 전국지도이다. 목판본으로 찍어서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도록 만들어져 있으며, 남북이 22층이고 각각의 층을 접으면 책자가 된다. 지도의 실제 크기는 세로 약 7m, 가로 약 3m로 대단히 상세한 대축척지도이다. 1861년은 김정호가 『대동지지』를 저술한 해이다. 따라서 기존의 『청구도』에 기재되어 있던 지지적인 내용이 『대동지지』에 수록됨으로서 『대동여지도』에는 지지적인 내용이 없어졌다.
또한 목판본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지나치게 많은 내용을 모두 수록하기가 곤란하였다. 따라서 지지적인 내용이 아니라 하더라도 중요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지명은 삭제하였다.
강릉부의 경우를 보면 거리를 표시하는 수치나 대화·진부·임계·연곡·연곡포·남일리·남이리·우계·원립현 같은 지명은 『동여도』에는 있으나 『대동여지도』에는 보이지 않는다. 봉수·역·창고·고현 따위는 범례로 표시되어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대동여지도』는 이전의 다른 지도에 비해서 내용이 매우 산뜻해졌으며, 현대적 지도의 특징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축척은 『청구도』와 마찬가지로 1:160,000이다. 도로는 실선으로 나타냈으며, 그 위에 10리마다 점을 찍어 거리를 한 눈에 가늠할 수 있게 하였다. 전국지도로서는 『대동여지도』가 일반에 가장 잘 알려져 있다.
강릉부 지역을 살펴보자. 땅의 전체적 윤곽이 현대 지도에 매우 가깝다. 태백산맥은 굵은 선으로 또렷하게 나타냈으며, 그것으로부터 동쪽과 서쪽으로 분기한 2차 산지는 약간 가는 선으로 끊어짐 없이 정교하게 그려져 있다. 그 때문에 산지와 하천과의 대응 관계가 확연하게 식별된다. 지역 전체의 축척을 동일하게 적용했기 때문에 읍치는 위치만 표시되어 있고, 관아시설이나 향교의 존재는 보이지 않는다. 도로는 읍치를 결절점으로 해서 남북도로와 동서도로가 표시되어 있다. 태백산지를 넘는 고개는 4개가 있다. 목계역을 거치는 삽당령, 고단역을 거치는 삽현[삽당령], 제민원을 거치는 대관령, 그리고 이현(泥峴)이 그것이다. 그 중 대관령을 넘는 도로에는 횡계역을 비롯하여 진부역·서창·대화역·대화창·방림역·방림창·운교역·운교창이 표시되어 있다. 이 도로가 강릉에서 서울에 이르는 간선도로였다. 이 밖에도 남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는 오대산 우통수, 월정사 상원암과 사고(史庫)도 표시되어 있다.
2. 군현지도 중 낱장으로 된 지도
1872년의 군현지도가 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등의 사건이 발생하면서 서양의 동점에 대한 적극적인 대응책의 일환으로 1871년 전국의 군현에서 읍지가 편찬되고 1872년에는 지도가 제작되었다. 중앙에서 전국의 군사시설 및 지역의 실태를 파악할 목적으로 전체 458종의 지도가 제작되었다. 1872년의 군현지도는 그때 제작된 것이며, 남부 지역의 군현에는 진보·목장·성이 그려진 지도가 딸려 있기도 하다. 지도의 모습은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니면서도 내용이 매우 상세하다. 산과 하천, 고개, 왕릉, 사찰, 행정지명, 장시, 동리 등이 표시되어 있다. 때문에 지명이나 문화재 등 조선후기 지역사회의 이해와 복원에 중요한 자료적 가치가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그림의 방식이나 구성내용, 내용의 정도가 지역마다 큰 차이를 나타내는 것도 특징 중 하나다.
강릉부 지역을 살펴보자. 땅의 전체적 윤곽은 동서가 더 길게 표현되었다는 것을 제외하면 정밀하다고 말할 수 없다. 그림의 표현 방식이 회화적 아름다움을 지니는 경상도의 다른 지도들과 비교하면 강릉부 지도는 예술적 가치가 매우 낮게 보인다. 이러한 현상은 강릉부에만 국한되지 않고 강원도의 대부분 군현이 그러하다. 산지는 고립된 봉우리로 묘사함으로서 전체적인 흐름을 잘 보여 주지 못하고 있다. 때문에 산지와 하천과의 대응 관계도 매우 취약해졌다. 더욱이 산지와 하천을 모두 청색으로 표현하여 구별이 쉽지 않고, 하천의 폭은 실제보다 크게 그려져 있다.
읍치는 매우 크게 부각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을 두르고 있으며, 남문과 동문이 표시되어 있다. 강릉읍성은 중종 때에 석성으로 수축되었는데, 둘레가 약 3.80척이고 높이가 9척으로 알려져 있다. 성 내부에는 동헌과 객사가 여러 건물로 묘사되어 있고, 이름이 표기되지 않은 건물도 약간 보인다. 읍치 동쪽의 화부산 아래에는 향교가 보인다. 도로는 읍치에서 남북으로 발달한 것과 대관령을 넘는 것이 잘 묘사되어 있다. 도로 중간 중간에는 역명과 읍치로부터의 거리가 기재되어 있다. 왕조실록을 보관하던 사고(史庫)와 산성(山城)도 표시되어 있다.
또한 지도의 여백에는 지역 성격을 반영하는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옥계면은 ‘본래 고구려 지산현’이었다는 기록, 안인진은 ‘만호’가 주둔하였다는 기록, 안목 남쪽의 한송정은 ‘바다에 임했고, 소나무가 울창하다. 정자 곁에 차샘[茶泉], 석구(石臼)가 있는데, 술랑선인들이 놀던 곳’이라는 기록, 경포대에는 ‘호수의 둘레가 20리이고, 깊지도 앝지도 않아 겨우 사람의 어깨가 잠길 만하며, 사방과 복판이 꼭 같다. 서쪽 언덕에는 봉우리가 있고, 봉우리 위에는 누대가 있으며, 누대 가에 선약을 만들던 돌절구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첩으로 된 지도에는 방안을 사용하지 않은 지도 중 『해동지도』가 있다.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해동지도』에 수록된 군현지도이다. 『해동지도』는 370종의 지도를 8첩에 수록한 관찬 방안[경위선]이 표시되지 않은 회화식 군현지도집이다. 책의 크기는 세로 47.5㎝, 가로 30㎝이다. 국가적 차원에서 정책을 결정하는 데 활용된 지도로 제8책의 『팔도총도』와 제4책의 『서북피아양계전도』는 회화식 대형 전도이며, 나머지는 도지도·군현지도·군사적 요충지 지도의 순으로 편집되어 있다.
이 지도는 당시까지 제작된 모든 회화식 지도를 망라하고 있다는 점뿐만 아니라, 지리적인 내용을 가장 많이 담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지도를 중심으로 지리지를 결합한 측면이 강하며 홍문관이 주도하여 『여지도서(輿地圖書)』로 마무리되는 정책자료 편찬의 출발점이 된 지도첩이라는 데에 의미가 있다. 주기를 지도의 여백에 기록함으로서 지지적(地誌的) 내용을 지도와 동시에 파악할 수 있도록 만들어진 체제이다. 지도 여백에 쓰여 있는 내용은 주로 읍성의 규모, 호구 수, 전답규모, 곡물총수, 군병총수, 읍면의 경계 등에 관한 것이다.
강릉부 지역을 살펴보자. 당시 강릉의 실제 땅 모양은 동서가 길고 남북이 짧다. 그러나 이 지도에는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게 표현되었다. 땅 모양이 왜곡된 원인은 방안을 사용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전국의 군현을 같은 종이의 크기에 같은 방식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그림의 전체적인 구도는 태백산맥을 중심으로 동서의 지역을 나타내고 있다. 태백산맥은 산줄기를 굵게 나타냈으며, 그것으로부터 분기한 2차 산지와 3차 산지는 가늘게 표현하였다. 영동 지역보다 영서 지역이 크게 축소되었다.
읍치는 다른 사상(事象)에 비하여 매우 크게 부각되어 있다. 읍치는 성곽을 둘렀으며, 내부에는 동헌과 객사와 창고가 묘사되어 있다. 읍치는 남쪽만 제외하고는 삼면이 산지로 에워싸인 모습이다. 입지장소가 풍수에 입각한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이 동쪽에는 규모는 작지만 읍치와 같은 모양의 지형[지금의 화부산] 속에 향교가 자리하여 있다. 도로는 읍치를 결절로 하여 북쪽의 양양으로 가는 것, 남쪽의 삼척으로 가는 것이 표시되어 있다. 서쪽으로 가는 길은 세 곳이 있다. 대관령을 넘는 도로는 횡계역을 지나고 하진부를 거쳐 대화역·방림역·운교역에 이르고 있다. 진고개를 넘는 도로는 하진부에 이르기 전에 대관령을 넘는 도로와 합류한다. 목계역을 지나 삽당령을 넘는 도로는 고단역과 임계역면을 지나 대화역에서 대관령 도로와 만나게 된다. 역사 속에 존재하였던 내용으로 오대산 월정사 사고(史庫), 창고(臨溪倉·蓬坪倉·下珍富倉·羽溪面 縣倉), 서원[송담서원(松潭書院)·오봉서원(五峰書院)] 따위를 볼 수 있다.
방안을 사용한 지도 중 『조선지도』가 있다.
18세기 중기에 제작된 49.8×38.5㎝ 크기의 채색필사본 지도책이다. 여기에는 전라도 56개 고을을 제외한 함경도 23장, 평안도 42장, 강원도 27장, 황해도 23장, 경기도 33장, 충청도 54장, 경상도 71장의 고을이 순서대로 1책에서 7책으로 묶여 있다. 3책의 강원도와 7책의 경상도 목차 부분에 ‘비변사’라는 도장이 찍혀 있는 점으로 보아 비변사에서 보관하며 사용하던 지도였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지도는 4.2㎝의 방안 위에 그려져 있다. 이 방안은 축척의 역할을 하고 있기 때문에 전국의 모든 고을이 동일한 축척으로 그려져 있는 보기 드문 지도이다. 따라서 지도에 표현된 고을의 크기는 실제의 면적비율을 보여 주고 있다.
거리나 위치에 대한 정확한 지리정보를 목표로 한 지도이기 때문에 전통적인 군현지도에 나타나는 주기는 전혀 기록되어 있지 않다. 대부분의 고을은 제한된 책 크기에 맞추어 그려져 있지만, 그것을 벗어나는 큰 지역은 더 큰 종이 위에 그렸다. 강릉은 원주·홍천·춘천·이천·회양·울릉도와 함께 3책의 강원도에 포함되어 있다. 지도의 표현양식은 모든 지도가 동일하기 때문에 중앙에서 일률적인 방식으로 편집하여 그렸음을 알 수 있다. 동일한 정보는 동일한 기호로 표시하는 범례가 지도 전체에 통일적으로 적용되고 있다.
강릉부 지역을 살펴보자. 지도가 방안 위에 그려져 있다. 그래서 땅의 외곽이 현대 지도와 매우 흡사하다. 산줄기는 산체의 크기와 관계없이 같은 굵기로 나타내져 있다. 읍치는 속이 꽉 찬 홍색 원으로 바닷가에 위치만 표시되어 있다. 도로는 읍치에서 남북으로 통하는 것과 서쪽으로 가는 것이 묘사되어 있다. 남쪽 도로는 염항산을 넘고 안인역과 악풍역(樂豊驛)을 지나 삼척에 이르고, 북쪽 도로는 보현산을 넘고 동덕역(冬德驛)을 지나 양양으로 통하고 있다. 꽤 내륙으로 통하게 되어 있는 것이 특이하다. 서쪽 도로는 대관령을 넘고 도암면을 지나 방림면으로 이르고 있다. 이 도로에 역 이름이 구체적으로 표기되어 있지 않은 것도 특이하다. 운교역 이름의 한자는 다른 지도에서 운교역(雲交驛)으로 표기된 것과 달리 운교역(雲校驛)으로 되어 있다. 오대산에는 월정사와 사고(史庫)와 우통수가 보인다. 읍치 남쪽의 해령산과 북쪽의 사화산에는 각각 봉수가 있다. 안인의 풍호(楓湖)는 보이지 않는다.
지지(地志)에 포함된 지도로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강릉부 지도와 『관동읍지』의 강릉부 지도가 있다.
『여지도서(輿地圖書)』는 1757~1765년에 각 읍에서 편찬한 읍지를 모아 책으로 엮은 ‘지리지’이다. 295개의 읍지와 17개의 영지(營誌), 1개의 진지(鎭誌) 등 전체 318개의 지지가 수록되어 있다. 이 책이 읍지의 발달과정에서 중요한 점은 각 읍의 첫머리에 채색된 군현지도가 부착되어 있기 때문이다. 『여지도서(輿地圖書)』라는 책 제목은 ‘책’에 ‘여지도’가 딸려 있다는 뜻이다. 이렇듯 이 책에서는 지도가 매우 중요시되고 있다. 즉 읍지의 내용을 지도로 표현함으로서 읍지의 내용에 정확성이 더해지고, 지도의 이용으로 당시 사람들의 공간적 인식에 많은 영향을 주었을 것이다. 이 지리지는 전국에 걸쳐 동일한 시기에 작성되었기 때문에 사료적 가치가 높다. 『관동읍지』는 1871년(고종 8)에 만들어졌다. 이 책은 같은 해에 만들어진 다른 도의 읍지들과 체제와 성격에 많은 공통점을 지니고 있다. 26개 읍 가운데서 20개 읍에 읍 사례가 첨부될 정도로 읍 사례 중심으로 이루어져 있다.
강릉부 지역을 살펴보자. 읍지에 포함된 강릉부 지도는 대개 전체적인 이미지가 매우 거칠고, 내용도 소략하여 마치 약도(略圖) 같은 느낌이 든다. 『여지도서(輿地圖書)』의 강릉부 지도에는 태백산맥의 산줄기를 중심으로 영동과 영서 지역이 그려져 있다. 읍치는 대관령에서 분기한 산줄기 끝자락에 위치하여 있다. 읍치는 성곽을 둘렀는데, 동서남북의 사문이 표시되어 있다. 향교는 읍치로 연결되는 산줄기 중간에서 분기한 3차 산줄기의 끝자락에 자리하여 있다. 길은 읍치를 중심으로 남북도로와, 대관령과 삽당령을 넘어 서쪽으로 가는 도로가 표현되어 있다. 오대산에는 동대(東臺)·사자암·상원사·관응암·월정사·사고(史庫) 등의 누대와 사찰시설이 많이 표시되어 있는 것이 주목된다.
『관동읍지』에서는 읍치의 성곽과 성내의 관아시설이 상세하게 그려진 것이 주목된다. 성곽에는 남문과 동문이 표시되어 있으며, 성내에는 객사(客舍)를 비롯하여 관청(官廳)·내아(內衙)·사창(司倉)·대동청(大同廳)·지청(地廳)·단실(丹室)·동헌(東軒)·향청(鄕廳)·폐문루(閉門樓)·노방(奴房)·작청(作廳)·사령방(使令房)·형청(刑廳)·기병청(騎兵廳)·부사(府司)·○○·장청(將廳)·집사청(執事廳)·별노청(別奴廳)·군기(軍器)의 21개 관아시설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