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텐츠목차

동학농민운동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301351
한자 東學農民運動
영어음역 Donghak Nongmin Undong
영어의미역 Peasant Uprising of 1894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강원도 강릉시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박도식

[정의]

1894년(고종 31)에 전봉준(全琫準) 등을 지도자로 동학 교도와 농민들이 합세하여 일으킨 농민운동.

[역사적 배경]

동학은 심화되고 있던 봉건 체제의 모순과 열강의 침략 위기 속에서 1860년 최제우에 의해 창시되었다. 동학은 ‘인내천’(人乃天) 사상을 내세워 평민, 천민들의 큰 호응을 얻었다. 이에 위협을 느낀 지배층은 동학을 사교(邪敎)로 지목하고 1864년 교조인 최제우(崔濟愚)[1824~1864]를 ‘혹세무민(惑世誣民)’했다는 죄로 사형에 처했다. 이와 함께 동학도에 대한 탄압도 심화되었다.

강원도 지역에 동학이 전래되는 계기는 최제우의 제자 이경화(李慶化)가 영월로 정배(定配)되면서이다. 이경화는 1863년 3월경 영월 소밀원(小密原) 근처로 정배되어 있는 동안 동학을 포교하였다. 이후 1870년 10월경 최제우의 유족(부인, 두 아들, 세 딸)이 양양 교도 공생(孔生)의 주선으로 영양(英陽) 용화동(龍化洞) 상죽현(上竹峴)에서 소밀원으로 이주해 왔다. 1871년 3월에는 교조신원운동 이후 관병의 추격을 받는 몸이 된 최시형도 소밀원으로 일시 피신해 왔다. 이로써 동학의 조직적 기반이 영월 지방으로 옮겨져 영월 지방이 1870년대 동학의 재건 과정에서 대표적인 비밀 포교지가 되었다.

1870년대 영월·정선 지방을 중심으로 한 동학의 포교 활동이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교세가 확장되어 1880년 6월에는 인제에서 『동경대전(東經大典)』을 간행, 동학교문은 경전을 중심으로 포교 활동을 펼칠 수 있을 만큼 성장하였다. 영월·정선 일대에서 최시형이 포교 활동을 적극적으로 펼친 결과 1890년대 초에 이르면 동학의 포교 조직이 급속도로 불어나고 그 세력을 회복, 신장시켜 나갔다.

한편, 강원도 지역의 농민들은 사족과 요호 등 향촌 사회에서 주도권을 지닌 계층에 대항해 봉기를 일으켰다. 농민군이 사족과 요호층을 주로 공격하여 재물을 빼앗았던 것은 그들이 조선 후기 이래 점점 심화된 봉건적 모순 속에서 특권을 이용하여 갖은 모리를 행하던 계층이었기 때문이다. 사족·요호층에 대한 징치는 바로 농민군의 반봉건적 지향을 잘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민란으로 다듬어진 강원도 농민들의 반봉건 의식은 일찍부터 전파된 동학교의 조직과 합세하여 농민전쟁으로 승화되었다.

[발단]

강원도에서의 농민전쟁은 2차 농민전쟁 시기인 1894년 가을부터 시작되었다. 농민전쟁보다 30여 년 앞서 1862년에 삼남 지방을 중심으로 전국 72개 군현에서 반봉건 농민항쟁이 일어났을 때 강원도에서는 농민전쟁이 한 번도 일어나지 않은 채 잠잠했다. 그런데 개항 이후 사회 모순이 깊어지면서 강원도에서도 1884년부터 1894년까지 크고 작은 민란이 8개 지역에서 30여 차례 이상이나 일어나 전국에서 가장 높은 빈도를 보이고 있다. 이는 이 지역의 봉건적 모순이 극한 상황에까지 이르고 있었음을 반영하고 있다.

[경과]

강원도 농민전쟁은 크게 두 세력에 의해 전개되었다. 하나는 충청북도 제천·청주 세력과 연합하여 활동한 정선·평창·영월·원주 등의 영서 남부 세력이고, 다른 하나는 차기석을 중심으로 강원도 홍천군 일대에서 활동한 중부 내륙 세력이었다. 이 가운데 먼저 활동을 시작한 농민군 세력은 영서 남부 세력이었다. 1천여 명이 넘는 농민군 부대는 강릉부 대화면 모로치를 넘어 진부면 각지로 돌아다니며 포총, 창과 칼, 미투리[麻鞋]를 징발하여 무기와 군수를 보충한 뒤 9월 3일 대관령을 넘어 구산역(丘山驛)에서 하룻밤을 자고, 9월 4일 강릉부로 진입하였다. 별 저항을 받지 않고 강릉부를 점령한 농민군은 관아와 각 점막에 나누어 머물렀다. 9월 4일 밤에 농민군 후발대 수백 명이 구산역 쪽에서 내려와 합류하였다.

농민군은 강릉부에 4~5일 머무르는 동안 강릉부 관아 동문에 “삼정(三政)의 폐단을 뜯어고치고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이룩한다.”는 방문을 내걸었다. 그리고 삼정을 임의로 삭감하고 요호(饒戶)를 잡아들여 토지와 재산, 전답 문서를 빼앗고 이서(吏胥)들을 잡아들였으며, 민간의 송사를 마음대로 처결하였다.

이 때 겉으로는 농민군에 호응하는 척하면서 반격의 기회를 엿보던 반농민군은 민보군(民堡軍)을 조직하여 농민군의 경계가 느슨한 틈을 타 야습하기로 계획하였다. 9월 7일 반농민군은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늦은 저녁 어둠 속에서 농민군을 습격하였다. 불시에 습격을 당한 농민군은 제대로 대응조차 못하고 20여 명의 동료 시신을 남기고 대관령을 넘어 평창 쪽으로 퇴각해야 했다.

9월부터 10월까지 영월·평창의 농민군은 제천·청주의 농민군과 함께 정선군과 평창군을 점령하고 있었다. 당시 정선읍에 모인 농민군 수가 3,000여 명, 평창·후평에 모인 농민군이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정선군수는 10월 20일경 서울로 도망친 상태였고, 농민군은 이방의 목을 베고 강릉에 가서 9월의 복수를 하겠다고 선언했다. 정선·영월·평창의 농민군은 세를 모아 다시 강릉부를 점령할 계획을 세웠으나, 민보군의 반격과 11월 3일 원주에 있던 순무영(巡撫營)에서 파견된 순중군(巡中軍)의 토벌에 의해 세가 꺾이기 시작했다.

11월 5일에는 농민군이 평창에서 이시모리[石森] 대위가 이끄는 일본군 2개 중대와 2시간 넘게 전투를 벌였으나 100명의 희생자를 내고 정선 방면으로 퇴각했다. 정선·여량의 농민군은 11월 6일, 강릉의 중군 이진석이 이끄는 토벌군과 접전을 벌여 10여 명이 포살되고 이중집 등 5명은 체포되었다. 농민군의 가옥 70여 호도 뒤에 근거지가 될까 두려워한 토벌군에 의해 불태워졌다. 이즈음 삼척의 도상면 유천동의 농민군과 정선·대정·궁전 등지의 농민군이 세를 모아 정선과 삼척의 경계 지역에 모여 있었다. 정선·영월·평창의 농민군 가운데 일부는 토벌대에 밀려 11월 중순 이후 삼척 상하장면 쪽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11월 25일에는 강릉부를 점령하는데 참가했던 정선·여량의 농민군 지도자 지왈길이 잡혀 효수당했다. 11월 하순 이후 농민군은 반농민군의 계속된 추격과 토벌로 각지로 흩어져 버림으로써 강원도 농민전쟁은 막을 내리게 되었다.

[특징]

강원도의 농민전쟁에서는 일본군의 개입이 미미하였다. 제2차 농민전쟁 당시 일본군은 농민군을 전라도 서남 방면으로 몰아가는 포위 작전을 전개하였다. 그것은 삼남지방의 농민군이 강원도로 넘어가지 못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또한 철저히 다른 농민군과의 연계를 차단시키려는 것이었다.

일본군이 강원도 지역으로 농민전쟁이 확산되지 않도록 한 것은 바로 러시아를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다. 농민군이 강원도 산악지대를 통하여 함경도 산악지대까지 침투해 들어간다면 러시아 측에서는 이를 빌미 삼아 조선 사정에 개입해 들어올 여지가 있었다. 당시 청·일전쟁을 마무리하지 못한 시점에서 러시아의 개입은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부담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강원도 지역에서 일본군의 참여는 농민군의 패색이 어느 정도 짙어진 이후에 이루어졌다. 여기에 참여한 일본군의 규모도 중대(中隊) 수준이었다.

[참고문헌]
등록된 의견 내용이 없습니다.
네이버 지식백과로 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