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90072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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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斗應 |
영어공식명칭 | I Dueung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조성운 |
출생 시기/일시 | 1872년 12월 3일 - 이두응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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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사건 시기/일시 | 1895년 - 을미사변 발생 |
활동 시기/일시 | 1896년 - 이두응 보납산 전투 참여 |
관련 사건 시기/일시 | 1907년 - 정미칠조약 체결 |
활동 시기/일시 | 1907년 - 이두응 정미의병 활동 |
출생지 | 이두응 출생지 - 경기도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 |
활동지 | 이두응 의병 활동지 - 경기도 가평군 |
묘소 | 이두응 묘 - 경기도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 |
성격 | 의병 |
성별 | 남성 |
[정의]
개항기 경기도 가평군 출신의 의병.
[가계]
이두응(李斗應)의 본관은 전주이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이기식(李杞植)이다. 1872년 12월 3일 가평군 가평읍 달전리에서 태어났다.
[활동 사항]
이두응은 1895년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단발령이 발표되자 이에 반발한 양반유생들을 중심으로 발생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1896년 가평군에서 신재희(申在熹), 신재욱(申在旭), 이충응(李忠應) 등이 의병을 조직하여 춘천 이소응(李昭應)의 의병에 합류하였을 때 이두응도 함께 참여하였다.
춘천과 가평 지역에서 의병이 활동하자 조선 정부에서는 춘천관찰사 겸 선유사로 조인승(曺寅承)을 보내 의병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가평에 주둔하던 조인승은 의병의 습격으로 의병토벌에 실패하였고, 승리한 의병들은 음력 2월 1일 서울로 향하였으나 가평읍에 주둔하고 있던 정부군에 패퇴하였다. 이러한 춘천과 가평 의병의 활동 과정에서 이두응은 주로 의병의 식량과 의복을 조달하는 업무를 담당하였다. 또한 정미의병에도 참여하여 의병 간의 연락을 담당하였고, 이두응의 집에서 의병의 의복을 제작하여 공급하였다.
[묘소]
이두응의 묘는 가평군 설악면 위곡리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