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 정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6300599
한자 東萊 鄭氏
영어공식명칭 Dongnae Jeong Clan
분야 성씨·인물/성씨·세거지
유형 성씨/성씨
지역 경상남도 거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어윤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입향조 생년 시기/일시 1444년 - 동래 정씨 정지운 출생
입향 시기/일시 1470년 전후 - 동래 정씨 입향
입향조 몰년 시기/일시 1499년 11월 초4일 - 동래 정씨 정지운 사망
본관 동래(東萊) - 부산광역시 동래구
입향지 동래 정씨 입향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동래 정씨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 대야리
세거|집성지 동래 정씨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대산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동래 정씨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남상면 전척리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동래 정씨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영승리 장백 마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동래 정씨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마리면 율리 풍계 마을 지도보기
세거|집성지 동래 정씨 집성지 - 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군암리 송산 마을 지도보기
묘소|세장지 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대야리 오가 지도보기 선영
성씨 시조 정회문(鄭繪文)
입향 시조 정지운(鄭智耘)

[정의]

정회문을 시조로 하고 정지운을 입향조로 하는 경상남도 거창군의 세거 성씨.

[개설]

동래 정씨(東萊鄭氏)는 전국적으로도 분포가 많아 조선 시대에 재상을 많이 배출한 대표적 씨족이다. 15세 정지운(鄭智耘)[1444~1499]이 거창에 입향한 이래로 자손이 번성하여 현달한 자가 많아 영남 우도에서 인정하는 명문이 되었다.

거창 입향조인 15세 정지운은 14세 양평공(襄平公)의 제4남으로 성주에서 태어나 거창 남하의 무등곡[무릉리]에 자리 잡아 후손들이 세거하며 번성해졌다. 경상남도 거창군 내의 집성촌은 거창군 남하면무릉리대야리, 남상면대산리전척리, 마리면영승리 장백 마을율리 풍계 마을, 웅양면 군암리의 송산 마을이다. 거창군 이외에는 경상남도 함양의 안의와 수동과 지곡, 산청의 생초, 경상북도 청도의 풍각 등지에 산재해 있다.

입향조 정지운은 5현의 수현(首賢)인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과 사돈의 인연을 맺을 정도였으니, 그 학문과 덕행을 짐작할 수 있다. 그 후손들도 가풍을 이어받아 뛰어난 사람들이 많았다. 충효열 삼강에 모범을 보인 자와 유학에 조예가 깊어 문집을 남긴 자와 과거에 오른 자와 높은 관직에 오른 자들이 매우 많다.

[연원]

정씨(鄭氏)의 도선조는 신라 유리왕 때 정씨로 성을 하사 받은 6촌 중의 취산진지촌(觜山珍支村) 촌장 지백호(智伯虎)이다. 동래 정씨지백호의 34세손인 정회문(鄭繪文)을 원시조로 하나 상세한 계보가 전해지지 않으며, 정지원(鄭之遠) 이후에 계보가 확실하여 기세조(起世祖)가 되었다.

거창 입향조인 정지운은 김굉필과 사돈[김굉필의 딸이 정지운의 며느리임]을 맺을 정도로 학문과 덕행이 뛰어난 분이며, 그 가풍이 후손에게 그대로 전승이 되었으니 대표적인 후손들을 매거하면 다음과 같다.

충효열 삼강에 모범을 보인 자인 18세 정응두(鄭應斗)임진왜란 때 전사하여 삼강록에 등재되고 대구 구인사(求仁祠)에 봉향되었다. 18세 정유문(鄭惟文)·유무(惟武)·유영(惟英) 3형제와 19세 정이훤(鄭以愃)은 정유재란 때에 순국하였으며 정유문은 정충사(靖忠祠)에 봉향했다. 25세 정방무(鄭邦懋)는 효성이 지극해 호랑이가 도왔고, 26세 정희돈(鄭希敦)은 효행으로 정려(旌閭)가 내렸다.

과거에 오른 자는 문과에는 17세 정표(鄭彪)가 있고, 무과에는 16세 정성주(鄭成珠), 26세 정진권(鄭鎭權), 27세 정표영(鄭表永)·주영(鑄永)이 있으며, 진사는 21세 정시수(鄭時修)와 26세 정민표(鄭民表)가 있다.

유학에 조예가 깊어 문집을 남긴 대표자로 21세 정시수의 『금천집(琴川集)』, 22세 정형진(鄭滎振)의 『평암집(平巖集)』, 29세 정지선(鄭趾善)『긍재집(兢齋集)』과 정재선(鄭載善)의 『비소집(悱巢集)』 등이 있다.

[입향 경위]

입향조인 정지운은 경북 성주에서 생장했다. 아버지가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한 정충 적개공신이요, 경주 부윤을 역임하고 성주에 자리 잡았기 때문이다. 거창에 오게 된 인연은 알 수 없고, 남하 무릉리로 입향한 연대도 확실히 알 수 없으나 1470년 전후로 추정된다.

[현황]

거창군 내에 거주하는 동래 정씨는 809 가구에 2,203명으로 집계되어 있다. 후손이 흥성하여 각계에서 활동하고 있다. 29세 정주환(鄭柱煥)은 2회에 걸쳐 거창 군수로 선출되었다. 혈연의 힘이 컸던 것으로 보인다.

남하의 무릉, 남상의 대산과 전척, 마리의 장백과 풍계, 웅양의 송산은 집성촌의 명맥을 다소 이어 가나 남하의 대야리는 합천댐의 수몰로 인해 화수정과 육모정을 옮겼고, 후손들도 고향을 떠난 자가 많다.

[관련 유적]

1. 무릉리 유적

o 영빈 서원(瀯濱書院):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05호이며, 1744년에 창건되어 1868년에 훼철되었지만 1919년 유림의 협력으로 복원되어 유림에서 제향을 받든다. 구인사(求仁祠)에 봉향한 인물로 12세 정구(鄭矩), 14세 정종(鄭種), 17세 정표(鄭彪), 18세 정응두(鄭應斗), 21세 정시수(鄭時修), 22세 정형진(鄭滎振) 등 6위를 봉안했다.

o 열호재(悅乎齋): 동래 정씨와 서산 정씨가 서재로 지은 것을 1759년에 지금 자리로 옮겼고, 1960년에 다시 지었다.

o 정응두 유허비(鄭應斗遺墟碑): 임진왜란 공신이며, 1909년에 다시 세웠다.

o 정씨 고가(鄭氏古家): 경상남도 유형 문화재 제287호로, 18세 정응두의 현손 22세 정형초(鄭滎初)가 1686년에 창건했다.

2. 대야리 유적

o 삼우당(三友堂): 경상남도 문화재 제155호로, 21세 정시수(鄭時修)·정시웅(鄭時雄)·정시승(鄭時昇) 3형제의 학덕을 기려 후손들이 1913년에 세웠다.

o 화수정(花樹亭): 삼우당 앞에 있다. 팽다세연실(烹茶洗硏室)은 특이한 건축 구조를 하고 있으며, 1913년에 세웠다.

o 입암정(立巖亭): 29세 정지선이 노닐던 곳에 아들 정규흥(鄭圭興)이 6각으로 정자를 지어 6모정이라고도 하며, 합천댐으로 인해 이건했다.

o 대아 서당(大雅書堂): 동래 정씨 문중에서 1810년에 세웠다. 강신계(講信契)를 모아 후손들이 지금까지 이어가고 있다.

o 오가재(五可齋): 1568년에 오가암(五可庵)을 창건해 묘소를 수호하다가 퇴락하여, 1745년에 복원하여 ‘오가재(五可齋)’라 했고, 2004년에 중건했다. 2011년 오가재 오른쪽에 입향조인 15세 정지운을 기려 ‘현신 교위 동래 정공 유허비(顯信校尉東萊鄭公遺墟碑)’를 세웠다.

o 구종 형제 유적비(九從兄弟遺蹟碑): 9종반 간에 8문장가가 배출한 것을 후손들이 기리어 1974년에 세웠다.

3. 기타 지역의 유적

o 효자 정려(孝子旌閭): 마리면 영승리 장백 마을에 있으며, 26세 정희돈(鄭希敦)의 지극한 효행으로 1887년에 내려졌다.

o 존목재(尊睦齋): 남상면 원둔동에 있으며, 동래 정씨 문증 재실이다.

o 영명재(永明齋): 남상면 원둔동에 거주하는 동래 정씨를 비롯해 김(金)·오(吳)·박(朴) 4성씨가 자손들을 위해 1889년에 세운 서당이다.

o 하양재(霞陽齋): 남상면 대산리 대현 마을에 있으며, 19세 정하남(鄭霞男)과 24세 정승교(鄭承僑)를 기려 1910년에 지었고, 1990년에 중건했다.

o 오우재(五友齋): 남상면 대산리 대현 마을에 있으며, 동래 정씨 5형제가 수계한 재실로 1974년에 지었다.

o 삼사재(三斯齋): 남상면 전척리에 있으며, 정시승(鄭時昇)을 기려 세웠다.

o 호암재(虎岩齋): 남상면 임불리 남불 마을에 있으며, 정중홍(鄭重弘)을 기려 세웠다.

o 경모재(敬慕齋): 남상면 임불리 월포 마을에 있으며, 정복(鄭福)과 정변생(鄭卞生)의 유허를 기려 세웠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4.03.06 오탈자 수정 성씨 시조 인명 수정: 정지원(鄭之遠)→정회문(鄭繪文)
2023.02.23 오탈자 수정 [관련 유적]인명 수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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