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48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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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開寧民亂 |
영어음역 | Gaeryeong Millan |
영어의미역 | Gaeryeong Uprising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호동 |
종결 | 1862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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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생|시작 | 1862년 4월 7일 |
성격 | 농민 봉기 |
관련 인물/단체 | 김규진|안인택|문기표|이복대|정지평 |
[정의]
조선 후기 경상도 개령 지방[지금의 경상북도 김천시]에서 일어난 농민 봉기.
[역사적 배경]
전국적으로 발생했던 농민 항쟁의 하나인 개령민란은 삼정의 문란이 가장 심했던 때에 일어났다. 전정(田政)·군정(軍政)·환곡(還穀)의 문란, 즉 삼정의 문란이 계속 되자 동학이 일어나고, 1862년 2월에는 진주에서 민란이 발발하였다. 이러한 불길이 거창·선산·상주·성주를 비롯한 인근 고을에까지 번지더니 삼남 지방을 휩쓸었다. 이처럼 개령민란을 직접 자극한 것은 진주민란 이후 경상도 일원에서 발생한 연속적인 봉기에 더하여 개령의 수령과 향리층의 폭정이었다.
[경과]
1862년(철종 13) 개령현감인 김후근(金厚根)은 각종 부정을 행함과 동시에 결가(結價)[토지세]를 15냥으로 인상하였다[농민의 요구는 일반적으로 7~8냥이었음]. 이에 김규진(金奎鎭)은 관기(官紀)의 문란으로 민폐가 심하다는 점을 지적한 격문을 면임과 권농들에게 돌려 장날인 4월 8일 봉기할 것을 알렸다.
만일 백성 중 격문의 취지에 따라 봉기에 가담하지 않는 자가 있다면 가옥을 파괴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나 계획이 누설되어 개령현감 김후근이 6일에 김규진을 체포·구금하자 이 소식을 들은 백성 수천 명이 7일에 이천(梨川)시장에 모여 봉기하였다. 4월 7일 봉기를 일으킨 민란 세력은 관청을 점령하여 군정·전정·환곡의 장부를 불사르고, 현감과 이속을 구타하였다.
[결과]
김후근은 간신히 고향으로 피신하여 무사하였으나 군중은 여세를 몰아 관에 아부하여 치부한 자와 인심을 잃은 자의 집 50여 호를 불살랐다. 조정에서는 안동부사 윤태경(尹泰經)을 안핵사로 급파하여 실정을 조사하였다. 그 결과 김규진·안인택(安仁宅)·문기표(文基杓)·이복대(李卜大)·정지평(鄭之平) 등 5명을 민란 선동자로 인정하여 효수하였으며, 김후근도 책임을 물어 임자도로 귀양을 보냈다. 개령현감 후임으로 이종상(李鍾祥)을 임명하여 수습하게 했다.
[의의와 평가]
개령민란의 특기할 점은 향반(鄕班)인 김규진이 주도했고, 이방도 농민 편에 가담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농민들의 실정이 그만큼 열악했고 수령과 향리층의 수탈이 재지 사족이나 지주층에도 미쳤다는 것을 시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