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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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崔胤 |
영어음역 | Choe Yun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김병우 |
출생 | 1566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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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 1591년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시 양천동 노천[갈대]마을 |
성격 | 무신|의병 |
성별 | 남 |
본관 | 화순(和順) |
[정의]
조선 후기 김천 출신의 무신이자 의병.
[가계]
본관은 화순(和順). 증조할아버지는 최선문(崔善門)이고, 아버지는 최득종이다. 아들은 최경운·최기운, 손자는 최유형·최유선·최유림·최유수, 증손자는 최여망·최단망을 두었다. 아들 최경운과 최기운도 1630년(인조 8) 각각 33세와 28세로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대를 이어갔다. 이들은 병자호란이 일어났을 때 남한산성에서 인조를 지근거리에서 호종하였고, 그 공로가 인정되어 최경운은 태천현감이 되었고, 최기운은 은진군수가 되어 무관 가문의 번영을 이어갔다.
손자 최유형·최유선·최유림, 최유수도 모두 무과에 급제하여 변경 수비와 치안에 공적을 남겼으며, 이 가운데 최유형은 만호를 지냈다. 증손자 최여망과 최단망도 무과에 급제하여 무관의 길을 걸었다. 주위 사람들은 이들을 사대구무(四代九武)라 칭송하였고, 김천의 대표적 무관의 명문 집안으로 자리매김하였다.
[활동 사항]
최윤(崔胤)[1566~?]은 지금의 김천시 양천동 노천마을[갈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명종 때 용양위부사직을 역임하였으며, 모친이 위독하자 단지주혈(丹脂注血)의 정성으로 소생시켜 효자로 이름이 났을 뿐만 아니라 학문 또한 박학한 인물이었다. 최윤은 이러한 아버지 밑에서 단정하고 엄숙한 교육을 받았으며, 무예에 특출한 소질을 보였다. 체력을 단련하고 활쏘기와 말 타기를 즐겨 하였으며, 25세가 되던 1591년(선조 24) 무과에 급제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대장 여대로(呂大老)의 부대에 들어가 수명의 왜적을 베는 공적을 세웠고, 정기룡(鄭起龍) 장군의 부대에 편입되어 선봉장이 되었다. 용력이 절륜하여 의병들의 기세를 높였고, 전장으로 나아갈 때는 상투에다 새끼를 동여매고 쏜살같이 달려 나가 적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하였다. 이때는 상투의 새끼가 하늘을 향해 꼿꼿하게 서 있어 그의 기상을 짐작하게 하였다고 하며 후에 절충장군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