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088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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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林鍾業 |
영어음역 | Im Jongeop |
이칭/별칭 | 임업이(林業伊),임기업(林基業),임송춘(林松春)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송호상 |
출생 | 1907년 9월 8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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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 | 1923년 4월 |
수학 | 1924년 9월 |
수학 | 1925년 6월 |
활동 | 1926년 6월 26일 |
활동 | 1928년 6월경 |
활동 | 1928년 8월경 |
활동 | 1929년 5월 |
활동 | 1929년 7월 30일 |
활동 | 1930년 3월 15일 |
활동 | 1931년 12월 21일 |
활동 | 1932년 4월 |
활동 | 1933년 2월 |
활동 | 1934년 6월 23일 |
활동 | 1938년 2월 28일 |
활동 | 1949년 |
몰년 | 1950년 7월 14일 |
출생지 |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읍 황금정 7[현 김천시 황금동 7] |
학교|수학지 | 경상북도 김천 |
학교|수학지 | 서울 |
학교|수학지 | 서울 |
학교|수학지 | 중국 무창 |
활동지 | 경상북도 김천|서울 등 |
성격 | 독립운동가 |
성별 | 남 |
대표 경력 | 신간회 김천지회 선전조직부 부장|보도연맹 간사장 |
[정의]
일제 강점기 김천 출신의 독립운동가.
[활동 사항]
임종업(林鍾業)은 1907년 9월 8일 지금의 경상북도 김천군 김천읍 황금정 7번지[현 경상북도 김천시 황금동 7번지]에서 태어났다. 임업이(林業伊), 임기업(林基業), 임송춘(林松春)이라고 불리기도 했다. 임종업은 김천공립보통학교[현 김천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서울로 올라와 1923년 4월 서울 배재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1924년 9월 배재고등보통학교에서 일어난 동맹 휴교 사건 때문에 퇴학 처분을 받았다가 1925년 6월 중앙고등보통학교 3학년에 편입하였다. 이 시기 그는 사회과학연구회 및 서울청년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임종업은 중앙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순종의 장례일을 계기로 전개된 6·10만세운동에 적극 가담하여 활동했는데, 같은 학교의 유면희(柳冕熙)로부터 태극기와 격문을 전달받은 임종업은 이현상 등과 함께 국장 행렬이 종로3가 단성사 앞을 지나갈 때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며 휴대한 격문을 배포하는 활동을 하였다. 이로 인해 1926년 6월 26일 경성지방법원에서 제령 위반제로 기소 유예되기도 하였다.
1927년 6월 중앙고등보통학교를 그만둔 임종업은 중국으로 건너가 무창(武昌)의 중산대학(中山大學) 예과에 입학하였다가 4개월 만에 그만두었다. 이후 상해에서 생활하다가 1928년 6월경 귀국 후 고향으로 돌아온 임종업은 잠시 『조선일보』 김천지국을 경영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임종업은 김천유학생회가 주최한 강연회에 황태성 등과 함께 연사로 선정되었다. 그러나 강연회 개최 하루 전인 8월 25일 경찰이 강연회의 연제(演題)와 연사가 모두 불온하다는 이유로 강연을 금지하였다.
그즈음 임종업은 신간회 김천지회에서도 활동하였다. 신간회 김천지회는 1927년 6월 경상북도 지역에서 최초로 설립된 사회 단체였다. 신간회 김천지회에서 임종업은 1929년 5월 서무부 총간(總幹), 같은 해 7월 30일의 임시 대회에서는 집행위원에 임명되었으며, 같은 날 개최된 집행위원회 회의에서는 선전조직부 부장에 임명되었다. 또한 임종업은 1929년 1월 김천청년동맹에도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임종업은 1930년 1월 부산 조선방직주식회사에서 파업이 발생하자, 신간회 부산지회와 부산합동노동조합에서 활동하던 김시엽(金時燁) 등과 함께 파업 지원 활동을 전개하였다. 임종업은 ‘우리들은 일어섰다’, ‘일본 제국주의에 반항하고 그 식민지 착취 정책에 반대한다’는 내용의 격문 200여 장을 작성하여 부산 및 조선 각지의 사상 단체에 배포하였다가 부산경찰서에 검거되었다. 그리하여 1930년 3월 15일 부산지방법원에서 「출판법」 제11조와 「보안법」 제54조 위반으로 징역 10개월을 선고받고 복역 후 1931년 1월 19일 출옥하였다,
출옥 후 고향으로 돌아온 임종업은 1931년 12월 21일 김창식(金昌湜), 박희수(朴喜洙) 등과 함께 현재의 사회제도를 타파하고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비밀 결사인 김천그룹을 조직하였다. 김천그룹의 구성원은 주로 김천청년동맹과 김천소년회의 간부 혹은 회원들이었다.
그러나 김천경찰서에서 1932년 2월부터 소년들에게 마르크시즘 강좌를 한다는 이유로 지역 활동가들을 검거하면서 김천그룹은 더 이상 활동을 지속하지 못하였다. 당시 서울에 피신해 있던 임종업은 1932년 4월 김천경찰서에 검거되었다. 1933년 2월 임종업은 대구지방법원에서 김창식, 나정운, 백낙도와 함께 비밀 결사를 조직하고 공산주의를 선전하며 동지 규합을 했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이 적용되어 징역 2년을 선고받았다. 임종업은 복역 중 결핵성 척추염으로 인해 1934년 6월 23일 형집행 정지로 출옥하였다.
출옥 후 임종업은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1933년 4월경 조직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는 약 300여 명의 회원이 독서회와 야학회 등을 운영하고 있었다. 임종업은 1935년 4월까지 황태성 등과 함께 김천그룹재건협의회에서 활동했다. 그러나 조직원 이병일이 김천경찰서에 검거되면서 김천그룹재건협의회의 전모가 드러나 결국 수십 명의 조직원이 김천경찰서에 잡혀 들어갔고, 수개월의 취조 기간을 거친 후 임종업을 포함해 총 25명이 최종 공판에 회부되었다.
1938년 2월 28일 대구지방법원은 임종업에게 “조선의 독립 및 조선 내 사유 재산 제도를 부인하는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도모할 목적으로 비밀 결사를 조직한 점과 그 목적 수행을 위해 활동한 점, 그리고 국체 변혁의 목적을 가지고 그를 실행하고자 행동한 점”에 대해 「치안유지법」을 적용하여 징역 2년을 선고하였다. 이후 임종업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하다가 1939년 3월 15일 출옥하였다.
해방 이후 임종업은 예비 검속으로 인해 또다시 수형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1949년 보도연맹 간사장을 지내다가, 1950년 7월 14일 6·25전쟁 중 경찰에 의해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