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320188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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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烏山城 |
영어공식명칭 | Geumo Mountain Fortress |
영어음역 | Geumosanseong |
영어의미역 | Geumo Mountain Fortres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산184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이주림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12월 11일 - 금오산성 경상북도 기념물 제67-3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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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금오산성 경상북도 기념물 재지정 |
개축|증축 | 1410년 |
개축|증축 | 1413년 |
개축|증축 | 1868년 |
조성|건립 | 고려 후기 |
현 소재지 |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 산184 |
성격 | 산성 |
양식 | 석축 |
관련 인물 | 이명웅|이각 |
크기(높이, 길이, 둘레) | 6.3㎞[길이]|3,500m[둘레] |
면적 | 346,404㎡ |
소유자 | 국유 |
관리자 | 경상북도 구미시 |
문화재 지정번호 | 경상북도 기념물 |
[정의]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오봉리에 위치한 고려 후기의 산성.
[개설]
금오산은 동남쪽으로 팔공산[1,193m]과 마주보고 있고, 남쪽으로는 수도산[1,327m]과 가야산[1,430m], 북쪽으로는 황학산[1,111m], 서북쪽으로 삼도봉[1,172m], 민주지산[1,241.7m]과 맥을 같이 한다. 행정 구역 상으로 보면, 금오산은 경상북도 김천시 남면, 구미시, 칠곡군 북삼면 사이에 위치한다.
[건립 경위]
금오산성의 수축 연대는 문헌상으로 정확히 확인할 수 없다. 하지만 고려 말 왜구들의 침입이 내륙까지 빈번했고 인명 살상과 노략질이 심해지자 주민들이 천혜의 요새인 금오산으로 피난, 산성을 쌓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당시 고려 말 선산·안동·개령·성주 등지의 많은 주민들이 징발당하여 산성을 수비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 시대인 1410년(태종 10) 금오산성을 수축(修築)하였고 1413년에 개축(改築)이 이루어졌다. 이 무렵 성내에 3개의 못, 4개의 샘이 있었다. 군창이 있던 것으로 보아 상당한 규모로 수칙, 정비되었음을 알 수 있다. 1595년(선조 28) 비변사에서 금오산성 수축의 필요성을 상계(上啓)하였다. 즉 당시 조정에서는 금오산성에 지정학적 특색으로 인해 인동(仁同)의 천생산성(天生山城)과 함께 큰 진(鎭)을 설치하자는 논의가 이루어졌다.
두 산성은 동서로 마주 서서 낙동강(洛東江)의 험조를 끼고 바로 중로(中路)의 요충이 되니 반드시 지켜야 할 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에 선조는 배설(裵楔)에게 우의정겸하사도도체찰사(右議政兼下四道都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의견을 들은 뒤 보수하도록 명하고 공사를 전담케 했다. 이원익은 당시 선산부사(善山府使) 김윤국(金潤國)이 금오산성 수축 임무를 감당하지 못할 것으로 판단하고 진주목사로 있던 배설을 선산부사 겸 금오산성 별장(別將)으로 임명하였다.
다음해인 1596년(선조 29) 다시 배설에게 경상도조방장(慶尙道助防將)을 겸임케 해 산성 수축과 방어를 맡도록 조치하였다. 당대의 문신 최현(崔晛)[1563~1640]이 남긴 『일선지(一善志)』를 보면, “부사 배설은 조정의 명령으로 금오산성을 개수하는데 본부인 선산부를 포함한 9개 주현[문경·함창·상주·금산·지례·개령·성주·고령]의 민과 군을 동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1597년(선조 30) 7월 왜군이 금오산성을 재침입[정유재란]해 왔으나 앞선 2년간 산성의 수축, 방책을 튼튼히 하고 병력을 강화해 왜군들이 쉽사리 공략하지 못한 것으로 전해진다. 당시 금오산성은 군사적으로 최전방 지휘부로, 행정적으로 전란시 백성들을 보호하는 한편 다각적 의병을 전개한 대관방(大關防)이라 할 수 있었다. 1592~1598년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지역에서 금오산성의 역할은 지대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1639년(인조 17)에도 경상감사 이명웅(李命雄)이 경상도 진관(鎭管)의 속오군(束伍軍)을 동원하여 산성을 더 쌓았다. 금오산성을 축성(築城)한 공로를 인정받아 선산부사(善山府使) 이각(李恪)은 통정(通政)을 가자(加資)받았다. 1868년(고종 5)에는 금오산성(金烏山城)의 성책과 공관(公館)을 보수하였다. ‘금오산성중수송공비(金烏山城重修頌功碑)’에는 “1868년에 흥선대원군 섭정 당시 내성을 수축했는데 누각 규모가 100여 칸에 이르렀고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관아와 군창을 새로 지었다.”라고 기재되어 있다.
[형태]
금오산성은 구미시와 김천시 남면, 칠곡군 북삼면의 경계 지점인 해발 977m 금오산 정상부 둘레 약 3,500m를 테뫼형[정상 부근에 머리띠 모양으로 성을 쌓는 방식]으로 두른 석축 산성이다. 정상부와 계곡을 이중으로 둘러 내성과 외성이 존재하는 이중 구조이다.
성내는 산의 윗부분에 둘레가 10리, 외성은 계곡을 감싸는 데 둘레가 5리이다. 내·외 성벽의 길이는 6.3㎞이다. 산성 종단[길이 방향]은 대체로 급경사를 형성하고 산성 내측[서북쪽]은 완경사를 이루고 있다. 이 같은 흔적으로만 봐도 금오산성이 임진왜란 당시 이곳 일대 지방 문지기로서 견고하고 규모가 웅장했음을 알 수 있다.
금오산성은 남문·서문·중문·암문(暗門) 및 건물터를 제외하고 거의 파손되었다. 축성 시 사용했던 자연석은 지형 탓으로 일부분이 20~30㎝ 정도 불규칙적으로 흩어져 있다. 구미시는 지난 1991년부터 4년여 동안 15억여 원을 들여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은 금오산 진입 주통로의 외성인 성곽 보수 150m, 성문 및 성루 신축, 200여m의 등산로 개설 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지금까지 제대로 된 성곽 보수 공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의의와 평가]
금오산성은 고려 시대 때 축조되어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모두 4차례에 걸쳐 수축(修築)·개축(改築)·가축(加築) 등으로 외침을 막아낸 산성으로 역사학적 의미가 크며, 조선 시대 산성 연구에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1986년 12월 11일 경상북도 기념물 제67-3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경상북도 기념물로 재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