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801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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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節祠 |
영어음역 | Chungjeolsa |
영어의미역 | Chungjeolsa Shrine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유적/건물 |
지역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최범호 |
성격 | 사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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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식 | 맞배지붕 |
건립시기/일시 | 1990년 |
정면칸수 | 3칸 |
측면칸수 | 2칸 |
소재지 주소 |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 |
[정의]
전라북도 고창군 성내면 조동리에 있는 장연우(張延佑)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당.
[개설]
충절사는 고려의 충신인 장연우(張延佑)를 기리기 위해 세운 사우이다. 장연우는 고려 현종 때의 대신으로, 시호는 충숙(忠肅), 본관은 흥성(興城)이며, 장유(張儒)의 아들로 영매(英邁)한 천품(天品)에 지략이 있고, 문학 또한 대성하였다. 고려 성종 때에 문과에 합격해 여러 요직을 거쳤다. 1010년(현종 1)에 병부시랑(兵部侍郞)으로 30만 대군을 인솔하고 거란병을 통주(通州)에서 방어하였다. 이듬해에 거란병이 개성을 함락하여 왕이 광주(廣州)로 남행할 때 홀로 호종하며 난국을 타개한 공으로 중추원사(中樞院使)와 어사대사(御史臺事)가 되었다.
하지만 병란으로 국가의 재정이 부족하자 군대의 영업전(永業田)을 회수하여 백관(百官)들의 급록(給祿)을 보충해 무신들의 원망을 들었다. 원심(怨心)을 품은 김훈(金訓), 박성(朴成) 등이 난을 일으켜 왕을 감금하고 협박하여 장연우와 그 아버지 장유를 제거하라고 협박하여 강릉에 유배되었다. 이로부터 무신들이 국정을 잡아서 정치의 기강이 무너지자 왕이 이자림(李子琳) 등과 모의하여 김훈 등을 주살하고 다시 불러 호부상서(戶部尙書)를 제수하였다. 사후에 좌복야(左僕射)에 증직되었고 충숙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위치]
충절사는 조동리 동촌마을 북쪽 안길로 들어가면 마을 맨 위에 자리하고 있다.
[변천]
원래 재실은 1750년(영조 26)에 남원 일원에 거주하던 후손들의 성금으로 건축된 4칸짜리 초가로, 오른쪽으로 객침실(客寢室), 대청, 살림방, 부엌으로 배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이후 후손들이 제사를 지내고, 묘비도 건립하다 1990년에 충절사를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형태]
충절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을 한 사당과 강당인 모충당(慕忠堂), 재실인 추모재(追慕齋), 내삼문 및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현황]
음력 3월 19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