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D0102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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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정을경 |
학력고사 세대라면 교과서 속 수필 ‘갑사로 가는 길’을 기억할 것이다. 이 수필은 작가 이상보가 겨울에 동학사에서 갑사로 산을 넘으면서 만난 남매탑의 전설을 되새기고 그 감상을 수려한 문체로 적은 글로서 교과서에까지 수록되었다. 이제 이상보 전집 정도를 사야 접할 수 있는 ‘갑사로 가는 길’, 이 짧은 수필이 1990년대 이전까지 갑사의 부흥에 일조했을 것임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지금은 토요일 오후, 동학사(東鶴寺)엔 함박눈이 소록소록 내리고 있다. 새로 단장(丹粧)한 콘크리트 사찰(寺刹)은 솜이불을 덮은 채 잠들었는데, 관광(觀光) 버스도 끊인 지 오래다. 등산복 차림으로 경내(境內)에 들어선 사람은 모두 우리 넷뿐, 허전함조차 느끼게 하는 것은 어인 일일까?
대충 절 주변을 살펴보고 갑사(甲寺)로 가는 길에 오른다.
산 어귀부터 계단으로 된 오르막길은 산정(山頂)에 이르기까지 변화가 없어 팍팍한 허벅다리만 두들겼다. 그러나, 지난 가을에 성장(盛裝)을 벗은 뒤 여윈 몸매로 찬바람에 떨었을 나뭇가지들이, 보드라운 밍크 코트를 입은 듯이 탐스러운 자태(姿態)로 되살아나서 내 마음을 다사롭게 감싼다.
흙이나 돌이 모두 눈에 덮인 산길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며 오르는 우리들은, 마치 북국(北國)의 설산(雪山)이라도 찾아간 듯한 아취(雅趣)에 흠씬 젖는다. 원근(遠近)을 분간(分揀)할 수 없이 흐릿한 설경(雪景)을 뒤돌아보며, 정상(頂上)에 거의 이른 곳에 한일자(一字)로 세워 놓은 계명정사(鷄鳴精舍)가 있어 배낭을 풀고 숨을 돌린다. 뜰 좌편 가에서는 남매탑(男妹塔)이 눈을 맞으며 먼 옛날을 이야기해 준다.
때는 거금(距今) 천 사백여 년 전, 신라(新羅) 선덕여왕(善德女王) 원년(元年)인데, 당승(唐僧) 상원대사(上原大師)가 이 곳에 와서 움막을 치고 기거(起居)하며 수도(修道)할 때였다.
비가 쏟아지고 뇌성벽력(雷聲霹靂)이 천지(天地)를 요동(搖動)하는 어느 날 밤에, 큰 범 한마리가 움집 앞에 나타나서 아가리를 벌렸다. 대사(大師)는 죽음을 각오(覺悟)하고 눈을 감은 채 염불(念佛)에만 전심(專心)하는데, 범은 가까이 다가오며 신음(呻吟)하는 것이었다. 대사가 눈을 뜨고 목 안을 보니 인골(人骨)이 목에 걸려 있었으므로, 뽑아 주자, 범은 어디론지 사라졌다.
그리고, 여러 날이 지난 뒤 백설(白雪)이 분분(紛紛)하여 사방을 분간(分揀)할 수조차 없는데, 전날의 범이 한 처녀(處女)를 물어다 놓고 가버렸다. 대사는 정성(精誠)을 다하여, 기절(氣絶)한 처녀를 회생(回生)시키니, 바로 경상도(慶尙道) 상주읍(尙州邑)에 사는 김 화공(金化公)의 따님이었다. 집으로 되돌려 보내고자 하였으나, 한겨울이라 적설(積雪)을 헤치고 나갈 길이 없어 이듬해 봄까지 기다렸다가, 그 처자(處子)의 집으로 데리고 가서 전후사(前後事)를 갖추어 말하고 스님은 되돌아오려 하였다.
그러나, 이미 김 처녀는 대사의 불심(佛心)에 감화(感化)를 받은 바요, 한없이 청정(淸淨)한 도덕(道德)과 온화(溫和)하고 준수(俊秀)한 풍모(風貌)에 연모(戀慕)의 정(情)까지 골수(骨髓)에 박혔는지라, 그대로 떠나 보낼 수 없다 하여 부부(夫婦)의 예(禮)를 갖추어 달라고 애원(哀願)하지 않는가? 김 화공 또한 호환(虎患)에서 딸을 구원(救援)해 준 상원스님이 생명(生命)의 은인(恩人)이므로, 그 음덕(陰德)에 보답할 길이 없음을 안타까와하며, 자꾸 만류(挽留)하는 것이었다.
여러 날과 밤을 의논한 끝에 처녀는 대사와 의남매(義男妹)의 인연(因緣)을 맺어,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돌아와, 김 화공의 정재(淨財)로 청량사(淸凉寺)를 새로 짓고, 암자(庵子)를 따로 마련하여 평생토록 남매(男妹)의 정으로 지내며 불도(佛道)에 힘쓰다가, 함께 서방 정토(西方淨土)로 떠났다. 두 사람이 입적(入寂)한 뒤에 사리탑(舍利塔)으로 세운 것이 이 남매탑(男妹塔)이요, 상주(尙州)에도 또한 이와 똑 같은 탑(塔)이 세워졌다고 한다.
눈은 그칠 줄 모르고, 탑에 얽힌 남매(男妹)의 지순(至純)한 사랑도 끝이 없어, 탑신(塔身)에 손을 얹으니 천 년 뒤에 오히려 뜨거운 열기(熱氣)가 스며드는구나!
얼음장같이 차야만 했던 대덕(大德)의 부동심(不動心)과, 백설(白雪)인 양 순결(純潔)한 처자의 발원력(發願力), 그리고 비록 금수(禽獸)라 할지라도 결초심(結草心)을 잃지 않은 산중 호걸(山中豪傑)의 기연(機緣)이 한데 조화(調和)를 이루어, 지나는 등산객(登山客)의 심금(心琴)을 붙잡으니, 나도 여기 몇일 동안이라도 머무르고 싶다.
하나, 날은 시나브로 어두워지려 하고 땀도 가신지 오래여서, 다시 산허리를 타고 갑사로 내려가는 길에, 눈은 한결같이 내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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