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7D02010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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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 | 충청남도 공주시 계룡면 중장리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성봉현 |
[언제 창건되었나.]
공주에는 역사 깊은 사찰과 절터가 수없이 많이 남아있다. 이는 백제의 고도에서 조선시대 충청도관찰사가 머무는 충청감영이 있던 ‘공주’의 지역적 위상 덕분이며 그것은 즉 많은 사람들이 공주에 살았음을 보여주는 증거이기도 하다.
계룡산에 사찰이 들어서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통일신라시대부터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갑사가 백제 때에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지만, 입증할만한 증거가 없고, 679년 대대적인 증축과 도량이 설시되었다는 사실만이 전해질 뿐이다. 갑사는 계룡산에서 가장 번창한 사원이었다. ‘甲寺’라는 말뜻 자체가 ‘첫 번째 절’인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으며, 특히 신라의 통일 이후 신라 통합운동의 사상적 기반이 된 화엄종 사찰로서 국가적 지원을 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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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일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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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갑사의 위상]
신라 말의 승려이며 풍수설의 대가였던 도선국사는 “산의 기운이 모인 곳에 사찰을 세우면 마치 사람의 병이 있는 곳에 침을 놓아 병의 기운이 절로 사라지는 것과 같으니, 나라에서 타점(打點)이 될 만한 곳으로 3,800여 군데가 있다. 갑사 또한 타점에 들어가는 곳으로 비보의 점이라 이를 만 하다.”라 하였다. 갑사의 터가 국가를 보호하는 명당자리라는 이야기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의 영향으로 대부분 사찰의 위세가 약화되었지만, 갑사는 여전히 예전의 위상을 유지했다. 조선 2대왕인 정종은 갑사에 원당을 마련하여 궁중의 보련(寶輦, 임금이 타는 가마) 1대를 하사했고, 세종 때에는 ‘계룡사’ 라는 이름으로 선종에 속하게 되면서 여러 가지 유리한 혜택을 받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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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대웅전
[국가의 위기를 함께하다.]
1583년 북방의 여진족이 침략하자 삼남지방의 사찰로부터 대종(大鐘)을 징납받아 대포와 군기를 만들었는데, 이때에 갑사에서도 모든 종을 상납했고, 난이 평정되자마자 바로 8천근의 대종을 주조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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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동종
임진왜란때에는 갑사의 승려였던 영규(靈圭)가 승병 1000명을 끌고 청주전투에 참전하였고, 금산전투에서 전사함으로서 그를 기리는 표충원이 건립되었다. 정유재란때에 왜군에게 약탈당하고 건물이 화염에 휩싸여 폐사의 위기에 처하기도 했지만, 갑사의 승려와 공주에 부임한 관료들의 도움으로 불사를 일으켜 다시 옛모습을 되찾았다.
[혼란의 시기를 지나 본연의 모습으로]
국가적 전란으로 위기를 넘기며 그 후로도 여러번의 중창을 거듭하였고, 일제강점기에는 진해당에서 아이들을 모아 가르치며 근대교육의 기회를 마련하는 등 갑사는 국가의 혼란상황에 능동적으로 대처하며 계룡산을 넘어 충청우도의 ‘으뜸가는 절’의 지위를 잃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일제에 의해 승려들이 대처승화되어 한동안 가족을 가진 대처승이 갑사에 머물기도 하였는데, 이승만 정권이 들어선 후 비구승으로 교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갈등이 야기되었다.
1960년 7월 23일 중앙일보 기사에 의하면 비구승이 장악해 온 공주 갑사에 4·19 이후 대처승이 다시 절을 찾으려 한 나머지 급기야 폭행사건이 벌어졌다. 어느날 새벽, 사찰 주도권관계로 감정이 있던 대처승 행자 최모씨는 비구승인 유모씨가 화장실에 가는 것을 보고는 갑자기 나타나 주먹으로 때려 1주일 이상 치료를 요하는 상해를 입혔는데, 결국 비구승 2명은 대처승의 강요로 절에서 퇴거하고 대처승이 갑사를 점거하게 되었다. 이 일에 대해서는 동네주민들도 기억하고 있다. 대처승이 있을때에는 괴목제를 사찰과 함께 지내다가 비구승이 들어온 후 동네에서만 지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4·19 무렵이라 한다. 이 사건 후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으나, 현재의 갑사는 비구승이 운영하고 있다.
갑사의 건물로는 대웅전, 강당, 대적전, 천불전, 응향각, 진해당, 적묵당, 팔상전, 표충원, 삼성각, 종각, 요사채 등이 있고, 부속 암자로 내원암, 신흥암, 대성암, 대적암, 대자암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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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전각 배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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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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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