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29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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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高靈誌 |
영어의미역 | Chronicle of Goryeong |
분야 | 역사/근현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전적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
시대 | 근대/개항기 |
집필자 | 김용만 |
[정의]
1910년 이두훈(李斗勳)이 고령 지역의 강계(疆界)와 연혁(沿革) 등을 엮은 책.
[개설]
조선시대 편찬된 관찬 읍지로 가장 오래된 것은 임진왜란 이전에 편찬된 『함주지(咸州誌)』다. 이후 숙종 대까지 경상도의 진주, 안동, 경주, 상주 등의 읍지가 나왔다. 영조와 정조 연간에는 32개 지역의 읍지를 묶은 『경상도읍지(慶尚道邑誌)』가 나왔으며, 1832년(순조 32)에 나온 『경상도읍지』의 경우 71개 읍지를 묶은 것이다. 1871년(고종 8)에 편찬된 『영남읍지(嶺南邑誌)』는 64개 지역의 읍지를 묶었다. 1895년(고종 32)에는 66개 지역, 1899년(고종 36)에는 68개 지역의 읍지가 편찬되었다. 이두훈의 『고령지(高靈誌)』는 19세기 이래 활발하게 간행된 관찬 읍지의 영향을 받아 20세기 초에 편찬된 사찬 읍지로 볼 수 있다.
이두훈은 『고령지』의 서문에서 창강(滄江) 김택영(金澤榮)의 『동국사략(東國史略)』과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의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를 참고하여 강계(疆界)와 연혁(沿革) 두 편을 편찬했으며, 나머지 부분은 『경상도읍지』 중 『고령지』와 한강(寒岡) 정구(鄭逑)의 『함주지』도 많이 참고했음을 밝히고 있다.
[서지적 상황]
본서의 저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 한국학연구원(도서번호 奎 4157) 소장본이다.
[형태]
1권 1책으로, 필사본이다. 표제는 ‘고령지(高靈誌)’이다. 크기는 가로 19㎝, 세로 30.1㎝이다.
[구성/내용]
책의 첫머리에 이두훈의 「고령지서(高霊誌序)」가 실려 있으며,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여강(驪江) 이능렬(李能烈)이 지은 「서고령지후(書高霊誌後)」가 있다. 『고령지』는 상(上)·하(下)로 구성되어 있다. 상은 강계, 연혁, 방리(坊里), 산수(山水), 성씨(姓氏), 토산(土産), 토속(土俗), 단사(壇祠), 공해(公廨), 교원(校院), 정재(亭齋), 사찰(寺刹), 역원봉시(驛院烽市), 교점(橋店), 제언(堤堰), 분묘(墳墓), 정무(政務), 호구(戶口), 결부(結負), 세납(税納), 군액(軍額), 병비(兵備), 진공(進貢), 고적(古蹟), 고사(故事)로 구성되어 있다. 하의 목차를 보면 문관(文官), 무관(武官), 생진(生進), 음사(蔭仕), 유일(遺逸), 학행(學行), 문망(文望), 유석(儒碩), 충절(忠節), 효행(孝行), 열행(烈行), 수재(守宰), 제영(題詠), 발문(跋文)으로 구성되어 있다.
『고령지』는 『경상도읍지』 고령 편과 비교해 볼 때 내용상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경상도읍지』 고령 편을 보면 건치 연혁, 군명, 관직, 성씨, 산천, 풍속, 방리, 호구, 전부(田賦), 군액, 성지(城池), 임수(林藪), 창고, 군기(軍器), 관액(關阨)[없음], 진보(鎭堡)[없음], 봉수(烽燧), 학교, 단묘(壇廟), 불우(佛宇), 공해, 누정(樓亭), 도로, 교량, 도서(島嶼)[없음], 제언, 장시, 역원, 목장(牧場)[없음], 형승, 고적, 토산, 진공, 봉름(俸廩), 환적(宦蹟), 과거(科擧), 인물, 제영이 들어 있다.
이를 상호 비교해 보면 목차가 같거나 유사한 명칭도 있으나, 이는 경상도 열읍의 내용을 담기 위한 공통의 내용 목차이기 때문이며, 『고령지』의 목차는 사찬 읍지로서 비교적 지역의 특징을 고려한 저자의 의도가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목차는 달리 하더라도 실제 내용에서는 유사한 항목도 있다. 하의 인물 편 목차는 『경상도읍지』 고령 편보다 매우 세분된 것으로 문관(文官), 무관(武官), 생진(生進), 음사(蔭仕)의 구분은 물론, 관찬 읍지에서 별다른 의미를 두지 않는 유일(遺逸), 문망(文望), 유석(儒碩)을 따로 정리한 것 등이 눈에 띈다.
[의의와 평가]
『고령지』는 사찬 읍지로서 김택영의 『동국역대사략』과 정약용의 『아방강역고』, 『경상도읍지』 중 『고령지』, 정구의 『함주지』를 체제나 내용면에서 두루 참고하였으나, 1910년경 고령군의 지역적 특징을 담아내기 위한 내용 목차를 구성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