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9009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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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金尙德 |
영어음역 | Gim Sangdeok |
이칭/별칭 | 영주(令州) |
분야 |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
유형 | 인물/의병·독립운동가 |
지역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권대웅 |
성격 | 독립운동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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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신지 | 경상북도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 |
성별 | 남 |
생년 | 1891년 |
몰년 | 1950년 |
본관 | 경주 |
대표경력 |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위원장 |
[정의]
일제강점기 고령 출신의 독립운동가.
[개설]
김상덕(金尙德)[1891~1950]은 지금의 고령군 대가야읍 저전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경주(慶州)이며, 호는 영주(令州)이다. 홍와(弘窩) 이두훈(李斗勳)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활동사항]
김상덕은 1912년 고령공립보통학교와 1915년 경신학교를 졸업한 후 1917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정칙영어학교(正則英語學校)를 거쳐 와세다대학[早稻田大學] 정경학부에 입학하였다. 조선유학생동우회에 참여하여 활동하던 중 1919년 1월 조선독립청년단을 결성하고 최팔용·최근우 등과 함께 실행위원에 선출되었다. 1919년 2월 조선독립청년단의 2·8독립선언의 대표로 「민족대표소집청원서」와 결의문을 발표하고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징역 6개월을 선고받고 복역한 후 1920년 2월 출옥하였다.
1920년 3월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파 고려공산당에 가입하였고, 1922년 1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여운형·김규식·박헌영 등과 함께 조선대표단의 일원으로 참가하였다. 1923년 1월 국민대표회의 경북대표, 1924년 4월 상해청년동맹 집행위원, 1926년 1월 한족노동당 조직, 1925년 정의부(正義府) 중앙위원, 1928년 2월 한족노동당이 재만농민동맹으로 전환하자 중앙집행위원회 책임비서에 선출되었다.
1928년 5월 독립운동 단체를 통합하여 하나의 당을 결성하기 위한 민족유일당 회의가 열렸다. 여기에서 기존 단체를 중심으로 유일당을 결성하자는 정의부 중심의 전민족유일당협의회(全民族唯一黨協議會)와 기존 단체를 부정하는 사회주의 계열 중심의 전민족유일당촉성회(全民族唯一黨促成會)로 분열되었다. 김상덕은 이청천·김동삼·김원식 등과 정의부를 탈퇴하여 전민족유일당촉성회에 가담하였다. 그 후 김좌진·김승학 등과 혁신의회(革新議會)를 조직하여 민족유일당 결성을 목표로 민족유일당재만책진회(民族唯一黨在滿策進會)를 결성하였으나 국민부(國民府) 출범으로 1929년 5월 해체되었다.
혁신의회 해체 후 1930년 7월 결성된 한국독립당(韓國獨立黨)에 가입하여 참모로서 랴오닝성[遼寧省] 통화[通化]와 지안[集安]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특히 1933년 2월 참모장 신숙(申肅)과 남경 중국국민당 정부에 특사로 파견되어 한·중 연합군을 조직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1934년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상하이[上海]의 한국혁명당(韓國革命黨)이 통합된 신한독립당(新韓獨立黨)의 중앙청년부장, 1935년 4월 의열단의 조선혁명간부학교 교관, 1935년 7월 조선민족혁명당 중앙위원 및 서기부원, 1940년 조선민족혁명당 소속군 조선의용대의 본부 편집위원회 위원 등으로 활동하였다.
1941년 5월 조선민족혁명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를 결의한 뒤, 1942년 10월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 1943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선전부 선전위원, 1943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학무부 차장, 1944년 4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문화부 부장 등으로 활동하던 중 해방을 맞이하였다.
1945년 11월 김구 등과 귀국한 뒤 자주적인 통일 민족 국가를 수립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것이 제헌국회[1948년 5월 31일~12월 18일]가 친일파 청산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을 제정한 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를 구성하였는데, 김상덕은 위원장으로 선출되었다. 6·25전쟁 발발 후 1950년 7월 납북되었다. 납북 후 북한에서의 행적은 정확히 밝혀진 바 없으나, 『북한총람』에 의하면 남북된 인사로 구성된 재북평화통일협의회 중앙위원이었으며, 1958년 12월 숙청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90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