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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후립 이전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1977
한자 崔厚立
영어공식명칭 Choi Hurip
이칭/별칭 여중(汝中),야정(野亭)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박미선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44년연표보기 - 최후립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92년 - 최후립 임진왜란 의병장 부임
몰년 시기/일시 1592년연표보기 - 최후립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04년 - 최후립 선무호종공신 2등에 녹훈
성격 의병
성별

[정의]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활동한 광주 출신의 의병장.

[가계]

최후립(崔厚立)[1544~1592]의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여중(汝中), 호는 야정(野亭), 계림부원군(鷄林府院君) 최광위(崔光位)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도사(都事) 최종호(崔宗灝)이다.

[활동 사항]

최후립은 1544년(중종 39) 전라도 광주[지금의 광주광역시 남구 양산동 수춘마을]에서 태어났으며, 성품이 굳세었고 절의가 있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스스로 순절할 것을 맹세하고 당시 7세였던 아들 최급(崔岌)에게 "임금께서 피란한 때에 대대로 녹을 받은 후예로서 어찌 난을 피할 것인가. 마땅히 한번 죽을 각오가 있을 뿐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다. 유언을 남긴 후 주부(主簿) 최응룡과 동생 최홍립(崔弘立), 남평에 사는 주부 홍민언(洪民彦) 등과 500여 명의 의병을 모집하였으며, 1592년(선조 25) 6월 3일 월파(月波) 유팽노(柳彭老)가 이끄는 옥과(玉果) 의병과 합류하여 북진하였다.

진산과 여산을 거쳐 7월 9일 금산(錦山)에 도착하여 고경명(高敬命)과 합세하여 왜적 수백 명을 무찔렀다. 7월 10일 왜적이 급습하여 관군이 싸우지도 못하고 후퇴하자 사기가 저하되어 의병의 진(陣)이 무너지게 되었고, 최후립은 직접 칼을 빼들고 많은 적을 죽였으나 결국 고경명, 최홍립과 함께 같은 날 순절하였다.

[상훈과 추모]

최후립은 1604년(선조 37) 선무원종공신 2등에 녹훈되었고, 인조대에 자헌대부 병조참판에 증직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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