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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사학파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60003216
한자 蘆沙學派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광주광역시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정영수

[정의]

조선 후기 19세기 중엽에 활동한 기정진 및 제자들에 의하여 호남의 대부분 지역에서 배출된 문인 집단.

[개설]

노사학파(蘆沙學派)는 조선 성리학의 전개에 있어서 말기에 조선 성리학 자체 내의 여러 논쟁의 문제들을 해결하고자 하였다. 뿐만 아니라, 19세기 서구 세력의 침탈에 맞서 위정척사의 정신으로 싸우는 실천적 도학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노사학파는 호남 지역의 인물뿐만 아니라 서부 경상남도, 충청도의 인물들과 교류를 통하여 호남 지역의 대표적인 학파로 발전하였다.

[형성 배경]

광주 지역은 19세기부터 점차 교통이 발달하고 행정의 중심지가 되었다. 이와 함께 광주는 인구가 증가하고 경제적으로 성장하였다. 광주에는 다수의 지주 계층이 출현하였으며, 향촌 지식인들이 서당을 운영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이 조성되었다. 광주 지역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제자들 중에는 지주 출신이 상당히 많았으며, 향촌 사회에서 서당을 운영하면서 지식인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인물들이 많았다.

광주 지역에 노사학파가 형성된 계기는 두 가지이다. 첫째는 기정진의 40년간의 강학 활동에 의하여 양성된 제자들과 재전제자들 그리고 그 제자들의 제자들에 의하여 기정진의 학문이 계승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노사학파가 형성되었다. 둘째는 19세기 중엽의 조선 사회에서 광주와 장성 일대가 경제적으로 성장하였으며 교통의 중심지가 되어 유학의 지식을 배워 과거에 합격하거나 향촌 사회의 서당에서 지식인으로 활동하고자 하는 교육적 수요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노사학파가 형성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하였다.

노사 기정진은 의도적으로 학파를 형성하려 한 것은 아니지만 40세 이후 본격적으로 제자들을 받아들여 학파다운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기정진은 제자들과의 격의없는 대화와 토론을 통하여 학문을 체계화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기정진의 사후에 편집된 『답문류편(答問類編)』에 잘 드러나 있다. 『답문류편』은 1891년에 간행되었으며, 총 15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기정진은 제자들과의 토론을 통하여 자신의 학문 체계를 정립하고 전수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문인들은 강한 유대감을 가지게 된다. 노사학파의 학문적 유대감은 기정진의 성리학설에 대한 기호학계의 비판에 맞서는 데 크게 작용하였다.

기정진은 호남 지역으로부터 영남 우도 지역에 이르기까지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호남 지역으로는 장성, 담양, 광주, 화순, 고창 지역의 제자들을 배출하였고, 영남 우도 지역으로는 진주, 하동, 삼가 지역의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충청도 일부 지역에도 제자들을 배출하였다.

[관련 인물]

기정진을 종향(從享)하고 있는 장성의 고산서원(高山書院)에 배향된 직전 제자는 8인이다. 월고(月臯) 조성가(趙性家)[1824~1904], 석전(石田) 이최선(李最善)[1825~1883], 신호(莘湖) 김녹휴(金祿休)[1827~1899], 동명(東鳴) 조의곤(曺毅坤)[1832~1893], 노백헌(老栢軒) 정재규(鄭載圭)[1843~1911],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1846~1916], 대곡(大谷) 김석구(金錫龜)[1835~1885], 일신재(日新齋) 정의림(鄭義林)[1845~1910] 등이 배향되어 있다.

이 밖에 고산서원에 배향되지는 않았지만 뛰어난 제자로는 다음과 같은 인물이 있다. 오남(吾南) 김한섭(金漢燮)[1838~?], 월파(月坡) 정시림(鄭時林)[1833~?], 남파(南坡) 이희석(李僖錫)[1841~1904], 후석(後石) 오준선(吳駿善)[1851~1931],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1851~1908] 등이 있다.

기정진의 직전 제자들은 교육 활동을 통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기우만, 정의림, 정재규 등이 배출한 재전 제자는 대략 1천 명이다. 기정진의 재전 제자 중 대표적인 인물로는 다음과 같다. 기우만의 제자로는 육봉(六峰) 이종택(李鐘宅)[1865~?], 도봉(道峰) 공학원(孔學源)[1869~1939], 정재(正齋) 양회갑(梁會甲)[1884~?], 운파(雲坡) 김진현(金珍鉉)[1878~?] 등이 있다. 정재규의 제자로는 입암(立巖) 남정우(南廷瑀)[1869~1947], 율계(栗溪) 정기(鄭琦)[1879~?], 송산(松山) 권재규(權載圭) 등이 있다.

이들 재전 제자들 또한 기정진의 성리학설을 계승하고 제자들을 양성하는 교육 활동에 힘썼다. 기정진의 대표적인 제자들은 기정진의 성리학설에 대하여 수십 년 동안 강학과 토론의 과정을 통하여 학문을 계승하였다. 그들은 초야에 묻혀 학문 연구에 집중하였으며, 도학 정신을 기반으로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의 격변기에 위정척사운동을 진행한 대표적인 학파이자 한말 의병의 선구로 자리잡았다.

노사학파는 『노사집』 중간(重刊) 이후 기정진의 성리학설에 대한 기호학파 내부의 반발과 비판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대응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기정진의 학문은 대내외적으로 알려지는 계기가 되었으며, 이것은 20세기 초반 성리학계의 주요 논쟁의 하나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이최선은 「독외필(讀猥筆)」을 지어 기정진의 이기설을 다시 한 번 재정립하였으며, 정재규는 당시 기호학파의 중심 인물인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가 기정진의 「외필(猥筆)」「납량사의(納凉私議)」에 비판을 가하자 전우의 주장에 대하여 반박하는 글을 쓰면서 학술 논쟁을 주도하였다. 전우와의 논쟁은 정재규의 제자 정기와 공학원 등을 포함한 많은 제자들에게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이 논쟁이 심화되면서 기정진의 성리학설은 노사학파 내에서 자리잡게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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