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6000321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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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猥筆論爭 |
분야 | 종교/유교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광주광역시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영수 |
[정의]
노사 기정진이 1878년 작성한 「외필」의 성리설에 관한 노사학파와 여타 성리학자들의 논쟁.
[개설]
외필논쟁은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의 이(理) 중심의 성리설(性理說) 입장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외필(猥筆)」에 대하여 기호학계 전반으로 확대된 논쟁이다.
[역사적 배경]
노사 기정진은 기호학계의 중심으로 평가된 인물로, 죽기 1년 전인 1878년에 자신이 작성한 「외필」을 제자들에게 공개하였다. 기정진의 「연보」에는 1878년 8월 조목에 "「외필」을 작성하여 문인 조성가(趙性家)에게 보여주었다."라고 짤막하게 기록하고 있을 뿐이어서, 이를 둘러싼 전후 사정을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외필」의 핵심 내용은 율곡 이이가 '음정양동(陰靜陽動)'이란 개념을 '기자이, 비유사지(機自爾, 非有使之)'로 설명한 것에 대하여, 노사 기정진이 '기탈리위(氣奪理位)'라고 비판하고, 음정양동은 근원적으로 소이연(所以然)으로서의 이(理)가 기(氣)를 그렇게 시킨 결과라고 설명한 것이다.
율곡 성리설(性理說)의 특징은 이를 '기 운동의 표준'으로, 기를 '이를 실현하는 주체'로 설명하고, 이와 기를 '상호주재(相互主宰)의 관계'로 파악하는 것이다. 율곡에 따르면 이의 역할은 '기의 운동의 표준이 된다.'라는 이념적 차원에 한정되며, 현실의 세계를 주도하는 것은 기이다. 율곡의 '기발이승론(氣發理乘論)'은 이러한 취지를 담고 있거니와, 그리하여 옛날부터 많은 사람들이 율곡설을 '주기론(主氣論)'이라고 평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율곡의 설을 '주기론'으로 명명하는 것에 관하여는, 사상적으로 반대쪽에 있었던 퇴계학파의 비판이라는 견해도 있다.
이런 측면에서 기정진은 당시 기호학계에서 현상 세계의 운동 변화를 설명하는 기본 개념으로 원용하고 있었던 율곡의 "기틀이 저절로 그러할 뿐, 시키는 것이 있지 않다[기자이, 비유사지(機自爾, 非有使之)]."를 비판의 대상으로 삼았다. 기의 독자적인 운동 변화만을 인정한 것이 아니라, 현상 세계에서 운동 변화하는 것은 기일 뿐임을 강조한 것이다.
하지만 기정진이 이해한 '기자이(機自爾)'와 '비유사지(非有使之)'는 이(理)와 아무런 관련이 없는 기(氣)의 독자적인 운동 변화를 의미한다는 것이었다. 즉 이가 주재하지 않는 기의 자발적인 변화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와 관계하지 않는 기의 독자적인 운동 변화는 용납할 수 없는 것이고, 더욱이 두 명제를 수용하면 이의 주재는 부정되고, 두 개의 본령을 세우게 된다고 파악하였다. 즉 기의 독자적인 운동 변화를 부정하고 이 주재를 보다 철저히 하는 것이다.
노사의 「외필」은 이처럼 율곡설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내용이었으며, 「외필」이 기호학계에 널리 알려지면서 많은 파문을 일으켰다. 기호학계의 많은 학자들이 「외필」을 비판하는 논설을 지어 노사를 성토하고, 심지어는 『노사집(蘆沙集)』의 간행을 중단하라고 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자 노사의 제자들은 여러 학자들의 「외필」에 대한 비판을 반박하면서, 노사는 율곡의 학설을 충실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논지로 「외필」을 변호하였다.
[경과]
기정진의 「외필」에 대한 비판의 선봉에 선 인물들은 처음으로 문제를 제기한 권명희(權命熙), 최동민(崔東敏) 등을 비롯한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의 연재학파 문인들이었다. 연재학파 문인의 기정진 성리설 비판에 가장 중추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송병순이었다. 송병순은 연재학파 문인들과 더불어 기정진 성리설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간재(艮齋) 전우(田愚)와 긴밀한 유대를 가지면서 비판의 전면에서 활동하였다. 노사학맥을 제외한 다른 학맥의 비판은 주로 율곡의 '기자이, 비유사지(機自爾, 非有使之)'에 대한 옹호로 이어졌다. 간재 전우는 대략 세 측면에서 율곡의 '기자이, 비유사지'를 옹호하였다. 율곡의 '기자이, 비유사지'는 성리학의 기본 논리인 "이(理)는 작위(作爲)가 없고, 기(氣)는 작위(作爲)가 있다."라는 명제와 궤를 같이한다는 것, 주자(朱子)의 '이가 실제로 사물을 시키는 것이 아니라는 가르침을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다는 것, 율곡도 근원적으로 "이의 주재를 설파하고 있다."라는 것이 그것이다.
범 기호계열 학자들의 이론적 비판에 대하여 기정진의 주요 문인들은 반비판을 전개하며, 스승인 기정진의 학설을 옹호하는 데 앞장섰다. 더구나 논란이 비등하여지면서 학파 내부의 동요가 일어나자 노백헌(老柏軒) 정재규(鄭載圭), 일신재(日新齊) 정의림(鄭義林), 송사(松沙) 기우만(奇宇萬) 등을 중심으로 학파의 결속을 다지면서 공동 대응에 나섰다.
나아가 논란의 핵심 중 하나가 「외필」이 율곡을 비판하고 있다는 것이었던 만큼, 노사 문인들은 스승의 성리설이 기호학계의 연원이 되는 율곡과 배치되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해명하고자 하였다. 기정진의 가학(家學)이 율곡에서 비롯됨을 명시하고, 기정진 또한 평생토록 율곡의 도를 존경하고 믿었으며, 그 학문을 분명히 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다만 일부 내용에 있어 차이가 나는 것은 새로운 학설을 세우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당시 주기설이 성행하는 것을 보고 후학들을 경계하고자 한 것이라고 강변하였다.
[결과]
「외필」에 관한 논쟁은 20세기 초반까지 이어지는데, 아직 이 논쟁에 관한 총체적인 연구는 시도되지 않았다. 「외필」에 관한 성리학자들의 비판이든 노사학파의 대응이든, 주요 인물을 중심으로 파편적으로 연구가 수행되었을 뿐, 논쟁 전반에 관한 연구는 수행되지 않았다.
몇몇 의미 있는 성과는 「외필」이 율곡을 비판하는 것이 아니라, 퇴계학파의 이이 성리학설에 대한 재비판이라는 점과, 이 글은 율곡학파에서 소극적으로 해석되었던 이(理)의 주재성을 강조한 것임을 밝힌 것이다.
[의의와 평가]
한말(韓末)은 근대화를 둘러싼 급격한 변동기이었다. 사회적 혼란의 상황에서 「외필」은 지성사적 동력원으로서 성리학자가 사회 변동을 해명하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실천적 지침을 얻기 위한 글이다. 즉 한말 시대적 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노사 기정진의 전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