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620029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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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壬辰倭亂 咸安 戰鬪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경상남도 함안군 |
시대 | 조선/조선 전기,조선 후기 |
집필자 | 최정용 |
[정의]
임진왜란 때 함안 지역에서 왜적에 대항하여 벌어진 전투.
[개설]
임진왜란의 초기 전개 과정에 대해서는 전쟁 발발 이듬해인 1593년(선조 26) 윤 11월에 전황을 파악하기 위하여 중국 측의 사신이 파견되어 왔을 때 영의정 등이 왕에게 올린 보고문이 주목된다. 중국에 보내기 위하여 작성된 이 보고문은 당시 조선의 처지에서 전황에 대한 허위나 가감이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되기 때문이다.
이 보고문에 의하면, 왜란이 발생되기 1년 전인 1591년(선조 24) 여름에 일본에서 승려 현소(玄蘇)를 파견하여 무례한 외교 문서를 전달한 일이 있었다. 그 후 1592년(선조 25년) 3월 대마도의 추장(酋長) 평의지(平義智)의 배가 부산에 정박하였는데 첨사에게 전달한 글 속에는 길을 빌린다는 따위의 말이 있어 이들을 변경에서 모두 쫓아내게 하였다. 이어 1592년 4월 13일에 적이 변경을 침범하였다. 부산과 동래가 함락되었고, 첨사 정발(鄭撥)·부사 송상현(宋象賢)·양산 군수 조영규(趙英珪) 이하 수만 명이 전사하였다. 부산을 점령한 왜적은 작전 계획에 의해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와 오오토모[大友吉統]가 지휘한 제3군 휘하의 병력이 진주성을 향하여 진격해 나가게 되면서 함안 지역을 내습하게 되었다.
[역사적 배경]
1592년 4월 부산에 상륙한 왜적은 3개의 길[路]로 나누어, 고니시[小西行長]는 중로, 가토[加藤淸正]는 동로, 구로다[黑田長政]는 서쪽으로 진격해 왔다. 이후 약 7년 동안 조선 8도는 거의 전장화하여 많은 피해를 입었으며 경상도는 더욱 심하였다.
전쟁 발발 2년경, 경상도에 적이 있던 곳은 울산의 서생포와 동래·부산·양산·김해·웅천·창원·함안 등으로 특히 해안선에 집중해 있었다. 조선 군사들 중 왜적과 전투하다 함안과 진주 사이에서 전사한 자가 무려 수만 명에 달하였고 왜적은 경상좌도와 경상우도에 걸쳐 약탈을 자행하는 지경이었다. 함안 지역을 내습한 왜적은 구로다 나가마사와 오오토모가 지휘한 제3군 휘하의 병력이었으며 김해와 창원, 진주를 공략하였다.
[경과]
1592년 6월 28일 경상우도 초유사(慶尙右道招諭使) 김성일(金誠一)의 보고에 의하면, “함안 군수(咸安郡守) 유숭인(柳崇仁)은 장기간 전쟁터에 나가 있어 함안 지역 백성들이 흩어져 함안성이 비어 있었다. 성이 빈 지가 거의 한 달이 되었는데도 왜적들이 아직 쳐들어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6월 중에 순찰사가 비로소 군수로 하여금 돌아가 함안을 지키도록 하였다. 14일에 왜적들이 쳐들어와 여염집을 분탕질하자 군수가 흩어져 도망한 사람 100여 명을 소집하여 연일 공격하니 왜적들이 어지간히 퇴각하여 흩어졌는데……”라고 하였다. 이를 1차 함안 전투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후 순찰사가 군수를 근왕(勤王)한 일로 불러가자 왜적이 함안군 안에 들어와 포진해 버렸다. 당시 진주를 보존하려면 반드시 인근을 침범한 적을 공격해야 하였기 때문에 곤양 군수(昆陽郡守)를 중위장(中衛將)으로, 사천 현감(泗川縣監) 및 진주 판관(晉州判官)을 좌우 돌격장(左右突擊將)으로 삼아 정병 300명을 거느리고 가서 함안군에서 왜적을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연일 비가 내려 접전하지 못하였는데 왜적은 대군이 이른 것을 바라보고는 곧 퇴각하여 흩어졌다. 왜적이 퇴각하면서 교전은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상호 대치가 있었고 대치 상태에서 왜적이 스스로 형세가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기 때문에 이것은 편의상 2차 함안 전투라고 할 수 있다.
함안 군수 유숭인은 1592년 7월 25일 비변사(備邊司)의 요청에 의해 포상을 받았다. 전후에 참획(斬獲)한 왜적의 수가 47급이나 되어, 그 공을 평가하여 벼슬을 올려 주었다. 이듬해인 1593년 6월 16일 왜적이 수륙으로 나아가 함안을 함락하였다. 1593년 6월경이 되면 이미 함안(咸安)·합천(陝川) 등의 군과 고성(固城)·거제(巨濟)·사천(泗川)·진해(鎭海)·의령(宜寧)·창녕(昌寧) 등의 현은 모두 왜적들에 의해 분탕과 점거를 겪었다. 함안이 함락되는 과정에서 교전이 있었는지의 여부에 대하여는 실록의 기록으로는 확인하기 어렵다. 이 함락의 시점에서는 어느 정도의 저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여 3차 함안 전투라고 명명한다. 패배한 전투였던 3차 함안 전투를 끝으로 함안은 함락되면서 왜적들의 수중에 들어갔다.
[결과]
3차 함안 전투를 끝으로 함안이 함락된 뒤 살륙(殺戮)의 피해가 전년(前年)보다 더욱 심하였으며 왜적의 소굴이 되었다. 『선조실록(宣祖實錄)』의 1593년 6월 24일 선전관 조안방(趙安邦)의 보고를 보면 당시의 참상이 나타난다. 당시 조안방은 함안의 여러 장수가 주둔하고 있는 곳에 갔다. 각처에는 군량이 공급되지 않아 사졸(士卒)이 모두 굶주린 기색이었고, 5~6홉의 쌀로 죽을 끓여 두 사람이 나누어 먹으면서 날을 보내는가 하면, 심한 곳은 4~5일, 혹은 6~7일을 굶고 앉아 있었다. 도망하는 군졸이 매일 100여 명에 이르고 있었다. 양호(兩湖)의 군사는 모두 함안에 주둔하고 있었는데, 600~700리 밖에서 군량을 운반하였으나 물로 인하여 길이 막혀 군영 앞까지 운반하지도 못하였다. 또 경성에서부터 밀양에 이르기까지 쑥만 수북이 들을 덮었고 보이는 곳마다 인적은 없었으며, 적이 있던 진루(陣壘)에는 곳곳마다 백골만이 쌓여 있었고, 굶주린 백성들은 땅에 즐비하게 누워 있거나, 서로 잡아먹거나 하는 눈으로 보기 어려운 너무도 참혹한 모습이었다.
진주 병영에 있던 경상우병사 김응서와 웅천성에 주둔하던 고니시[小西行長] 등은 함안 지역에서 회담을 하였는데, 고니시가 1594년(선조 27) 10월 말경에 먼저 김응서에게 서신을 보내 강화 의논을 청하였다. 회담 장소는 고니시가 원하던 창원과 김응서가 원하던 함안의 중간 지점으로 정하였고, 날짜는 11월 22일로 하였다. 이리하여 11월 22일 함안 땅 지곡현[창원군 내서면]에서 김응서와 고니시의 회담이 열렸다. 회담에서 김응서는 왜군의 조속한 철퇴를 일관되게 요구하였고, 고니시는 조선이 일본과 명나라에 조공하는 것을 동의하고 명 황제에게 주청(奏請)하기를 열망하였다. 강화 교섭은 1592년 6월 9일의 대동강 회담을 시작으로 1596년(선조 29) 9월 2일 일본의 오사카성[大阪城] 회견으로 끝날 때까지 여러 차례 진행되었다. 함안 회담은 그러한 과정에서 열린 조일 회담의 하나였다.
[의의와 평가]
임진왜란 7년 동안 특히 남해안 일대 경상도는 왜군의 점령지였거나 주둔 지역 경계에 해당하였으므로 피해가 극심하였다. 함안과 칠원 지역은 남해안 지역에 속하였으며, 특히 지리적으로 왜군의 주된 공격 대상이었던 진주성으로 가는 길목에 위치하였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당시 진주성을 지키기 위해, 그리고 함안을 수복하기 위해 노력하는 조선군의 모습과 휴전 회담을 함안에서 하기를 원하는 모습에서 당시 경상도에서 함안의 지역적 중요성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