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50038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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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新幹會 益山支會 |
영어공식명칭 | Iksan Branch of the Shinganhoe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기관 단체/기관 단체(일반) |
지역 | 전라북도 익산시 |
시대 | 근대/일제 강점기 |
집필자 | 임혜영 |
[정의]
1927년 전라북도 익산 지역에서 설립된 신간회 소속 지회.
[개설]
1919년 3·1운동 직후 사회주의 사상과 노선이 국내에 도입되기 시작하여 1920년대 사회주의 독립운동 세력이 형성됨으로서 민족 독립운동 흐름은 민족주의 운동과 사회주의 운동으로 양분되었다. 그러나 일제에 항쟁하여 독립을 쟁취하기 위해서는 서로 협동 단결해야 한다는 자각이 생겼고 두 세력이 연합하여 1927년 2월 신간회를 창립하였다. 신간회는 일제의 탄압 속에서도 지방에 지회를 조직하기 위하여 노력하였고 지방의 유지들도 지회 설립에 적극적이어서 1927년 말까지 전국적으로 104개의 지회가 설립되게 되었다. 익산에서는 익산청년회를 중심으로 지회 설립을 추진하였다.
[역사적 배경]
1920년대 들어서 사회주의 사상이 확산되자 위기감을 느낀 민족주의 진영과 6·10만세운동 이후 활동이 점차 줄어들면서 새로운 계기가 필요했던 사회주의계가 ‘민족 단일당 민족 협동전선’이라는 구호 아래 설립하게 되었다. 여기에 일제는 독립운동 진영 전체에 대한 동태를 파악하기 쉽게 하기 위해 집회·결사의 자유라는 가장된 차원에서 신간회의 설립을 허가하였다.
[경과]
익산 지역에서는 신간회 지회를 설립하기 위하여 1927년 4월 16일 이리청년회관에 모여 백남순이 사회를 맡아 취지를 설명하였는데, 그 자리에서 지회 설치준비회를 조직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어서 회원 모집과 준비회 소집에 관해서 토의하였다. 신간회에서는 지회를 설립하는 과정에서 주의사항으로 “1구(區) 내 거주 회원이 30인 이상에 달한 후에야 지회를 설립할 수 있다.”라는 조항을 두었다. 따라서 30명 이상의 회원을 모집하여야 했다.
익산지회 설립준비회에서는 여러 가지 준비를 하는 가운데 회원 모집에도 성공하여 36명을 모집하였다. 1927년 6월 17일 본부의 승인을 얻어서 6월 29일 신간회 지회 설립대회를 개최하기로 하였다. 설립대회를 하루 앞둔 6월 28일에는 준비위원들이 ‘신간회란 무엇인가?’라는 제하에 ‘신간회 운동은 독립운동의 수확기인 것이다’라는 선전문을 이리 시내 각 곳에 배포하였다. 이리경찰서는 이미 선전문을 입수하였으나 선전문만으로는 처벌이 어렵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에 인쇄하여 배포하도록 두었다. 이리경찰서는 준비위원 가운데 이리청년회 집행위원 임혁근(林赫根)·동아일보 이리지국장 배헌(裵憲)·이리청년회 집행위원 임영택(林榮澤)을 구속하였다. 또 일경이 이리청년회관을 포위, 수색하여 배포하고 남은 선전문을 압수하였으며 설립대회를 금지하였다.
[결과]
신간회 익산지회의 설립을 준비하다 구속된 임혁근, 배헌, 임영택 3명은 출판법과 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임혁근은 징역 1년 6개월, 배헌과 임영택은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이에 불복하여 대구 복심법원에 공소한 후, 임혁근과 배헌은 벌금 50원, 임영택은 벌금 30원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설립대회를 치르지는 못하였지만 본부의 승인을 얻은 신간회 익산지회는 이후 익산 지역에서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의의와 평가]
익산에는 대농장이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에 신간회 익산지회에서는 농민운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힘썼다. 농민들이 소작쟁의에서 주로 주장하던 소작권의 확립, 마름 및 농감 제도의 철폐, 고율 소작료 인하, 자연 재해 등 불가항력에 의한 농작 손실의 지주 부담 등을 강력히 요구함으로서 농민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