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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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고종 31) 청일전쟁을 계기로 한반도에서 주도권을 장악한 일제는 다음 해인 1895년 명성황후를 시해한 후 친일 내각을 앞세워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강요하였다. 또한, 11월에는 단발령을 시행하여 국민적 분노를 샀는데, 그것은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당시 화서학파(華西學派)의 저명한 성리학자 유중교(柳重敎)가 강학하던 제천의 장담서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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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권호선(權灝善)[?~1897]은 청풍에 살던 선비이다. 호좌의진이 중부 권역의 20개 고을을 관장하던 충주부를 공략할 때 활약하였다. 당시 호좌의진의 주력 부대는 박달재를 경유하여 공격하였는데, 권호선은 신지수(辛芝秀)·조달승(曺達承) 등과 함께 별동 부대를 거느리고 청풍 쪽을 돌아서 충주성을 공략하였다. 충주를 빼앗기고 제천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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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백선(金伯善)[1873~1896]은 지금의 경기도 양평군 청운면 갈운리에서 태어났다. 1894년(고종 31) 동학 농민 운동 당시 맹영재가 조직한 포수 부대에 참여하여 농민군을 진압할 때 공을 세워 조정에까지 이름이 알려지고 절충장군의 첩지까지 받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지자 지평군수 맹영재에게 의병을 일으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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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명화(明火). 김병명(金秉明)[?~1896]은 제천시 금성면 동막리에서 살았다. 단발령 이후에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이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하였을 때 의병 운동에 참여하였다. 호좌의진은 충주성을 공략하고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군 주둔 지역을 공격하였는데, 특히 충주의 가흥에 자리 잡은 일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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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공매(公梅), 호는 벽하(碧河). 원주 안창마을에 세거하던 연흥부원군 김제남의 자손이다. 김사정(金思鼎)[1869~1942]은 진사를 지냈으며, 1895년 단발령 이후 안승우(安承禹)·이춘영(李春永)·김백선(金伯善) 등이 안창에서 의병에 가담하였을 때 사위인 이춘영을 매개로 하여 문중 대표로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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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지도하는 호좌의진은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하여 충주성과 곳곳에 자리 잡은 일본군 주둔 지역을 공격하였다. 특히 충주의 가흥에 자리 잡은 일본군 기지는 남한강 물길을 중간에서 차단하여 내륙으로 통하는 소금 등의 공급을 방해하였다. 이에 가흥의 일본군 기지를 제압하기 위해 여러 차례 가흥 공격 작전이 수행되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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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김수돌(金水乭)[?~1896]은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의 지도하에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서 포군으로 활동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와 방어전에 치중하고 있을 때 전군장 홍대석(洪大錫)의 부대에서 활약하였다. 1896년(고종 33) 4월 조령에서 작전을 벌이던 이강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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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김춘삼(金春三)[1879~1945]은 청풍의 사창리에 살았다. 1907년(순종 1) 7월 봉기한 조동규(趙東奎) 부대에 참여하여 전령(傳令)의 책임을 맡았다. 150여 명의 동료들과 함께 총기로 무장하고 충주·제천·청풍·원주 등지에서 일본군과 교전을 벌였으며, 같은 해 8월에는 청풍 읍내를 포위 공격하여 주재소에 불을 지르는 등 항전을 전개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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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제천시 화산동 남산에 있는 개항기 때 의병과 관군 사이에 격전이 벌어진 곳. 제천 남산은 제천 의병의 항일 정신이 깃든 격전지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 의병은 유인석(柳麟錫)을 창의대장으로 추대하고, 1896년(고종 33) 2월 17일에 충주성을 함락하는 등 기세를 떨쳤으나, 가흥과 수안보에 주둔하던 일본군 수비대와 관군의 공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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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1년부터 1259년까지 7차례에 걸쳐 고려를 침입한 몽골에 맞서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전역에서 일어난 항쟁. 7차례에 걸친 몽골의 침입 중 5, 6, 7차 침입 때 몽골군이 충청북도 충주와 제천 지역까지 공격해 왔다. 고려의 최씨 무신 정권이 안정되어 가던 13세기 초 몽골족이 금을 대신하여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 칭기즈칸은 북중국을 장악한 후 남송과 고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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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달성(達城). 자는 경은(景殷·敬殷), 호는 경암(敬菴). 서상렬(徐相烈)[1854~1896]은 명문가에서 태어났으며, 무과에 급제한 무인 출신이다. 임오군란 후 묄렌도르프가 등용되는 것을 보고 벼슬에 뜻을 버리고 낙향하였다. 김평묵(金平默)의 문하에 나아갔다가 이후 제천으로 낙향한 뒤 장담마을로 이주하여 유중교(柳重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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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영삼(靈三·英三), 호는 모양(慕陽). 신지수(申芝秀)[1854~1904]는 유중교(柳重敎)의 문인으로 일찍부터 제천 을미의병에 참여하였다. 특히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하는 의진이 붕괴되고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영월에서 출범할 때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다. 신지수가 제천 인근 지역에서 모아 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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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순흥(順興). 자는 계현(啓賢), 호는 하사(下沙·夏史). 아버지는 화서학파와 교류하던 지평의 선비 안종응(安鍾應)이다. 안승우(安承禹)[1865~1896]는 동향의 화서학파 학자인 이근원(李根元)에게 배우다가 이근원의 스승인 유중교(柳重敎)를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장담(長潭)에서 강학하던 유중교가 별세한 이후로는 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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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단양(端陽). 자는 이존(而尊). 우기정(禹冀鼎)은 제천의 백평(柏坪)[현 제천시 동현동 백배미]에서 살았다. 무과에 급제한 후 무직을 두루 역임하였고, 벼슬이 승지에 이르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여 제천을 장악하고 충주를 공략하러 나섰을 때 제천의 민군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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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우필규(禹弼圭)는 평창에 살았으며,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합류하여 좌익장에 임명되었다. 충주성을 점령하였던 호좌의진이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 충주로 들어오는 적을 막기 위하여 파랑령[제천시 봉양읍 구학리 배론마을 서쪽의 조백석골에서 백운면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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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원우규(元友珪)는 단발령 이후 전국적으로 의병이 일어날 때 제천의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던 인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단양군수, 청풍군수 등 친일 내각의 지시만을 받드는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1896년(고종 33) 2월 충주성을 공략한 이후 관찰사를 베고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호시탐탐 충주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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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리는 제천시 한수면의 면소재지다. 한수면사무소는 원래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충주댐 공사로 인해 1984년 6월 송계리로 이전하였다. 제천에서 충주 수안보 방향으로 청풍호를 끼고 가다가 월악교가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자락에 송계리가 위치한다. 또 충주 수안보에서 제천 방향으로 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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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계리는 제천시 한수면의 면소재지다. 한수면사무소는 원래 제천시 한수면 황강리에 위치하고 있었으나 충주댐 공사로 인해 1984년 6월 송계리로 이전하였다. 제천에서 충주 수안보 방향으로 청풍호를 끼고 가다가 월악교가 보이는 산모퉁이를 돌아서면 하늘을 찌를 듯이 높이 솟아 있는 월악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그 산자락에 송계리가 위치한다. 또 충주 수안보에서 제천 방향으로 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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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지역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군서(君瑞), 호는 회당(晦堂). 윤응선(尹膺善)[1854~1924]은 학행(學行)으로 이름이 높아 1889년(고종 26) 의금부도사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주역』를 공부하던 40세에 의당(毅堂) 박세화(朴世和)를 만났다. 윤응선은 본래 양평 출신인데, 병인양요 이후 조부를 따라 청풍 장선으로 이주하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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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에서 1911년 사이 충청북도 제천 지역을 포함한 전국에서 일제의 침략에 맞서 전개된 의병 항쟁. 을미년[1895년] 말의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이 봉기한 이래 1905년(고종 42)의 을사의병, 1907년(순종 1)의 정미의병에 이르기까지 제천 지역에서는 의병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1895년(고종 32)에 있었던 명성황후(明成皇后) 시해 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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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경기(李敬器)는 제천의 장담에 살았다. 삼화부사를 지냈으며, 무관의 후예로 병서에 능통하고 신언서판(身言書判)이 분명하여 많은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삼수 군수를 끝으로 퇴임하고 향리에 머물다가 단발령이 내려진 뒤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봉기하자 참여하였다. 친일 군수들을 처단하고 기세를 올린 호좌의진이 관찰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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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한여(翰汝)·효백(孝伯), 호는 명와(明窩). 이기진(李起振)[1869~1908]은 충주의 하곡[현 충주시 동량면 하천리]에서 태어났다. 유중교(柳重敎)·유인석(柳麟錫)에게 배웠으며, 을미 의병 당시 홍선표(洪選杓)·정화용 등과 함께 유인석의 종사로 활약하였다. 충주성 전투와 제천에서 패한 후 서행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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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명로(李明魯)는 주천 사람으로 진사에 오른 선비이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후 전국적으로 의병 봉기가 이어질 때 제천을 중심으로 일어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서 활동하였다.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충주성까지 나아가서 기세를 올리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돌아온 이후, 유인석은 의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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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문흠(李文欽)은 언양 현감, 상주 영장, 장진부사 등을 역임한 전직 관료로서 제천시 한수면 서운에 살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공략할 때 민병 130여 명을 모집하여 호좌의진을 후원하였다. 민병은 일반 농민으로 실질적인 전투력을 가진 포군과는 달랐지만 농기구를 무기로 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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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사섭(士攝), 호는 택옥(澤玉). 택당(澤堂) 이식(李植)의 후손이다. 호좌의진에서 전군장·중군장으로 활약한 안승우(安承禹)가 사위이다. 이민정(李敏政)[1845~?]은 제천의 신월리에 살던 진사로, 단발령 이후 의병 운동에 적극 나서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을 시종 도왔다. 의병 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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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병선(李秉善)[?~1896]은 글 읽던 선비 출신으로, 본관이나 생년은 알 수 없다. 단발령이 내린 후 전국적으로 의병 운동이 일어났을 때,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서 활약하였다. 친일 관료를 처단하고 충주성을 공략하는 등 기세를 올리던 호좌의진이 관군의 공세 앞에 무너져 근거지로 삼던 제천마저 빼앗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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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이원하(李元廈)는 자는 치택(致澤)이며, 강원도 평창 출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일찍이 오위의 사과(司果)를 거친 전직 관료로, 총을 잘 쏘았고 동학 농민 운동에도 가담한 적이 있으며 향중에 중망이 높았다고 한다. 단발령 이후 지평 출신의 포군을 기반으로 봉기한 제천의진의 지도자 안승우(安承禹)의 권유를 받고 의병 운동에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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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이정의(李正義)[1851~1933]는 본관이 전주(全州)로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태어났다. 무과에 급제한 선달이었는데,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발표되자 송지영(宋之永)과 더불어 장충식의 집에서 의병 통문을 작성하였다. 후에 단양 포군 30여 명을 데리고 충주성의 유인석(柳麟錫)을 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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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응천(應天), 호는 석포(石浦). 아버지는 이규수(李圭壽)이다. 이종국(李鍾國)[1860~1939]은 박세화(朴世和)에게 성리학을 배웠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이 친일 관료들을 척살하고 충주성을 장악하였을 때 운량관(運糧官)이 되어 식량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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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대재(大哉), 호는 휘암(徽菴)·은구와(隱求窩). 명문가로 이름 있는 월사(月沙) 이정구(李廷龜)의 후손이다. 동생으로 유인석(柳麟錫)의 종사로 활동한 이조승(李肇承)이 있다. 이주승(李胄承)[1870~1946]은 선공감 감역관을 지냈으며, 1895년(고종 32) 제천 을미의병 때 가문의 재력과 중앙 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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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명오(明五), 호는 백농(白農). 이진하(李晋夏)는 단양에 살던 선비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단발령 이후 제천을 중심으로 봉기한 호좌의진은 친일 군수들을 처단하고 충주성을 공략하는 한편, 주변의 여러 고을을 해방구로 확보하였다. 이때 호좌의진 대장 유인석(柳麟錫)은 장악하고 있던 고을마다 수성장을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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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우삼(友三), 호는 괴은(槐隱). 이춘영(李春永)[1869~1896]은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출신이다. 유중교(柳重敎)에게 직접 배우지는 않았으나 그의 척사 사상에 심취하였다고 한다. 이춘영에 대해서는 이념 지향적이었던 제천 의병의 지도부 속에서 예외적으로 실무적인 지도자였고, 일본의 포위망 속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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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장.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만여(萬汝), 호는 실곡(實谷). 이필희(李弼熙)[1857~1900]는 단양의 품달과 여주에 살았다. 무인 집안 출신이었으나, 유중교(柳重敎)를 만난 후 유학에 전념하였다. 을미년(1895)에 단발령 조치가 내려진 후 장담에서 처신을 두고 의병을 일으킬 것인가, 망명할 것인가, 자결할 것인가를 두고 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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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경문(敬文), 호는 청사(晴史).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의 후손이다. 이형구(李馨久)는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이 이끄는 호좌의진이 제천에서 봉기하였을 때 충주의 하곡에 살던 이기진(李起振)의 추천으로 의병 운동에 가담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다시 제천으로 돌아와 방어 전선을 펼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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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예천(醴泉). 자는 동일(東一). 족보에는 임도수(林道洙)라고 기재되었다. 임도봉(林道鳳)[1868~1896]은 제천시 수산면 도기마을에 살던 선비이다. 동학 농민 운동 당시 일본군에게 피살된 아버지의 원수를 갚고자 단발령 이후 의병이 일어났을 때 제천에서 봉기하였고, 유인석(柳麟錫)을 대장으로 하는 호좌의진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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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인동(仁同). 자는 수겸(受謙), 호는 중재(中齋). 아버지는 호좌의진에서 선비들을 맞아들이는 직책인 사객(司客)이었던 장충식(張忠植)이다. 장익환(張益煥)[1866~1915]은 단양의 상진에 살았다. 유중교(柳重敎)의 제자인 이근원의 제자이다. 단발령 이후, 단양에서 의병을 준비하던 중 이춘영(李春永) 등이 봉기하여 단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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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연일(延日). 자는 경존(景存). 정익(鄭瀷)[1860~1904]은 제천시 금성면 월림리에 있는 연일 정씨(延日鄭氏)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하는 호좌의진이 출범하자 문중의 여러 인사들과 함께 의진에 참여하여 대장 종사로 활동하였다.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고 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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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조달승(曺達承)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일어난 호좌의진에서 총독(摠督)으로 활약하였다. 충주성을 공략할 때 박달재 쪽을 지난 주력 부대와는 별도로 후군장 신지수(辛芝秀) 등과 함께 청풍 쪽으로 은밀히 병력을 이동시켜 충주성을 점령하는 데 공을 세웠다. 후에 충주성을 포기하고 제천으로 돌아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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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이필희 의진에서 활동한 의병. 본관은 한양(漢陽). 호는 해사(海史). 조준교(趙駿敎)[?~1896]는 청풍 출신으로 담론을 잘하고 글도 많이 읽은 호걸풍의 인물이었다고 한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에 지평[현 경기도 양평군] 출신의 포군을 바탕으로 구성된 의병 부대가 제천으로 들어와서 이필희(李弼熙)를 대장으로 추대하면서 새 출발하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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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여중(汝中), 호는 입암(立菴). 아들로 주현구(朱鉉九)와 주현삼(朱鉉三)을 두었다. 주용규(朱庸奎)[1845~1896]는 1845년(헌종 11) 함흥에서 출생하였으며,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이다. 스승이 장담으로 이주하자 가산을 정리하여 제천으로 이주하여 장담의 선비들을 이끌었다. 단발령이 내려진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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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 출신의 의병. 본관은 신안(新安). 호는 치용(致容). 아버지는 호좌의진의 의병 주용규(朱庸奎)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현구(朱鉉九)[1869~1897]는 장담에서 강학하던 유중교(柳重敎)의 문하에 출입하였다. 1896년(고종 33)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부친을 좇아 의진에 나아갔으며, 충주성 전투에서 부친이 전사한 후에도 더욱 열성적으로 의병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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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이강년 의진의 의병. 본관은 신안(新安). 자는 치강(致綱). 아버지는 을미 의병 당시 호좌의진의 대장 참모로 활동하다가 충주성 전투에서 순국한 주용규(朱庸奎)이다.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주현삼(朱鉉三)[1877~1908]은 제천의 팔송에 살았다. 유인석(柳麟錫)을 좇아 배움을 청하며 의병의 후예로서 의리를 지켰다. 1907년(순종 1) 여름 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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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채동집(蔡東集)[?~1896]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의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신지수(辛芝秀)가 이끄는 후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 홍귀봉(洪貴鳳)·임도봉(林道鳳) 등과 충주의 광동마을[현 충주시 산척면 송강리 광동마을]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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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한동직(韓東直)은 강원도 원주 출신이다. 오위장을 지낸 전직 관료 출신으로, 생몰년은 알 수 없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원주에서 의병이 일어났을 때 참여하였다가,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이 친일 관료를 베고 충주성을 장악하면서 기세를 올리자 병력을 이끌고 제천으로 달려와 참진(參陣)하였다. 가흥에 주둔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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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유인석(柳麟錫)이 조직하여 충청북도 제천을 중심으로 활동한 의병 조직. 호좌의진은 단발령 이듬해인 1896년 초에 강원도 영월에서 유인석을 대장으로 하여 조직된 의병 조직이다. 제천의 장담에서 강학하던 화서학파 선비와 지평 출신의 포군이 주축이 되었으며 제천 지역을 근거지로 항일 투쟁을 전개하여 제천 의병이라고도 한다. 한때 충주성을 점령하였고, 제천을 비롯한 충청북도·강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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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홍귀봉(洪貴鳳)[?~1896]은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의 지도하에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에 참여하여 신지수(辛芝秀)가 이끄는 후군 부대에서 활동하였다. 충주성을 장악하였던 호좌의진이 일본군의 압박을 견디지 못하고 제천으로 물러선 이후, 채동집(蔡東集)·임도봉(林道鳳) 등과 함께 충주의 광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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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항기 제천에서 봉기한 호좌의진의 의병. 홍대석(洪大錫)은 오위장(五衛將)을 지낸 전직 관료 출신으로 제천에 살았다. 1895년(고종 32) 단발령 이후 유인석(柳麟錫)을 중심으로 호좌의진이 봉기하였을 때 참여하였다. 1896년(고종 33) 초 호좌의진이 충주성을 장악하였을 때 달천의 유주막을 지키는 파수장으로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공을 세웠다. 제천으로 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