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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현유의 난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0702314
한자 車玄有-亂
영어음역 Cha Hyeonyuui Nan
영어의미역 Cha Hyeonyu's Rebellion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시대 고려/고려 후기
집필자 김일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성격 민란
발생(시작)연도/일시 1374년연표보기
종결연도/일시 1374년연표보기
발생(시작)장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발생(시작)장소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관련인물/단체 차현유|고신걸|문충걸

[정의]

1374년 제주에서 토착민 차현유(車玄有)가 주도하여 일으킨 민란.

[개설]

차현유는 13세기 전반부터 이미 탐라에 정착해 있던 토착민으로 마적(馬賊)의 무리를 이끌고 있었다. 차현유의 난은 1374년(공민왕 23) 10월 6일에 일어났는데, 이는 9월 23일 최영이 목호 세력을 평정하고 탐라를 떠난 지 13일밖에 지나지 않은 때였다. 차현유의 난에는 원나라의 추종 세력인 목호와 다수의 탐라인이 참여하며 민란으로 발전하였다.

[역사적 배경]

공민왕(1352~1374년)대에 제주는 하치〔哈赤〕라고 일컬어지던 목호(牧胡) 세력이 장악하는데, 이들은 제주에 있던 원의 국립 목장에 배속되어 말과 소 등의 사육을 관할하던 몽골족이었다.

1356년 공민왕이 원이 쇠망해진 틈을 이용해 고려의 자주성을 회복하려는 반원정책을 단행하면서, 고려와 목호 세력은 제주의 관할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해 수차례 충돌하게 되었다.

원간섭기가 끝난 뒤에도 목호 세력은 본국인 원의 지원이나 의사와는 관계없이 독자적으로 고려에 맞섰는데, 여기에는 고려 조정이 파견한 관리들의 폭정과 수탈에 반감을 가진 제주 사람들이 목호 세력에 가세한 것이 큰 힘이 되었다. 이 때문에 원이 사실상 망한 이후에도 목호 세력과 고려의 충돌은 계속 이어졌다.

[발단]

최영의 목호 세력 평정이 끝나고 얼마 후, 탐라만호는 마적 떼를 이끌던 차현유를 치기 위해 병사들을 준비하였다. 이 소식이 차현유에게 알려지자, 차현유는 관군이 손을 쓰기 전에 먼저 관아를 불사른 다음 안무사 임완(林完)과 목사 박윤청(朴允淸), 마축사(馬畜使) 김계생(金桂生) 등을 살해하였다.

[경과]

차현유의 무리가 관아를 불태우고 안무사 등을 죽이자, 최영의 목호 세력 평정에서 살아남았던 일부 목호 세력과 고려 조정에 반감을 갖고 있던 탐라인들이 차현유의 난에 가담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이 가담하면서 차현유의 난은 민란으로 성격이 변한다.

차현유의 난에 가담했던 사람들은 이후 난이 평정될 때까지 수없이 많은 우마(牛馬)를 잡아먹었다. 여기에는 최영이 목호 평정 이후 명나라에 바치려고 거두어 들였던 1,700필의 제주말 가운데 차후 수송을 기약해 남겨 놓았던 774필의 말도 상당수 포함되었다.

차현유의 난이 1375년(우왕 원년) 11월 9일자로 명나라의 중서성에 보고된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차현유의 난은 얼마 후 성주 고신걸(高臣傑)과 왕자 문충걸(文忠傑)이 진무사 임언(林彦)과 천호(千戶) 고덕우(高德羽) 등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하게 된다.

[의의와 평가]

차현유의 난은 고려 조정에 대한 반기로 일어난 민란의 성격이 짙다. 당시 제주는 원 간섭기가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은 때로서 원을 추종하는 세력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여기에 고려 관리들의 수탈과 폭정이 원 간섭기에 못지않은데도 성주와 왕자들이 이를 묵인하며 고려 관리와 영합한 데 따른 제주민들의 분노가 폭발한 측면이 강하다. 난에 가담했던 사람들이 명나라에 보낼 제주마를 잡아먹은 것은 차현유의 난이 단순한 민란이 아닌, 반고려·반명의 성격을 띠었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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