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2002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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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師吉墓碑 |
영어의미역 | Yi Sagil's Grave Monument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비 |
지역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조성진 |
성격 | 묘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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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일시 | 1722년 |
높이 | 210㎝ |
너비 | 90㎝ |
소재지 주소 |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 |
[정의]
충청남도 논산시 상월면 주곡리에 있는 조선 후기 이사길의 묘비.
[개설]
이사길(李師吉)은 1639년(인조 17)에 이양의 아들로 태어나 사산감역관을 지내고 임기를 마칠 즈음에 병을 얻어 사망하자 노성 술골(주곡리)에 장사하고 후에 묘비를 풍비로 세워놓았다.
[건립경위]
이사길은 1703년(숙종 29)에 사망하였는데, 1711년(숙종 37)에 아들이 출세를 하여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에 증직되었다. 이에 묘비를 세우기 위해 명재 윤증이 비문을 찬하고 대사성 최창대가 비문을 서하여 1722년(경종 2)에 묘역 앞에 세워놓았다.
[위치]
논산에서 대전으로 가는 국도 1호선을 타고 가다가 부적 논산 장례예식장 바로 옆 지방도 691호선으로 5㎞ 정도 가면 주곡리가 나오는데, 바로 길옆에 묘비가 보인다.
[형태]
묘비인데도 묘 앞에 세우지 않고 신도비 크기로 묘역 입구에 세워져 있다. 농대석 위에 대리석 비신이 세워졌고 지붕돌[가첨석]을 썼는데, 지붕돌의 조각이 기와지붕 모양을 잘 나타내고 있다. 비신의 크기는 높이 210㎝, 폭 90㎝, 두께 30㎝이다. 앞면에 전액을 새기고 비문을 기록하고 있다.
[금석문]
금석문의 전액(篆額)은 ‘증대사헌이공묘갈명(贈大司憲李公墓碣銘)’이며, 앞면에는 “有明朝鮮國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行四山監役官昭威將軍李公墓碣銘井序大匡輔國崇祿大夫議政府右議政兼領經筵事尹拯撰通政大夫成均館大司成知製 敎崔昌大書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 敎李世最篆李君子貞諱師吉其先咸平人高麗神武衛大將軍彦爲鼻祖入我朝莊襄公徒生策勳封咸城君其八代祖也曾祖諱璘司憲府監察祖諱應星郡守贈咸豊君考諱瀤府使贈戶曹判書妣晋州姜氏贈兵曹參判晋昭之女也君以崇禎己卯五月二十三日生早孤失學及長資居尼山仍受學於吾先君子未幾先君子捐世君亦栖遑京鄕憂冗纏錦竟不能劬書力學以有成就而於師門追慕篤至以爲沒身歸依依地魯岡書院之建也牛谷處士朴公世耈主其事而君實佐之殫竭誠力以底於成當己巳牛栗兩先生文廟輟亭之變一路多士抗章辨誣而君爲之首疏雖未徹士氣以張君與我兄弟情義如骨肉吾弟子恕性不能容人過每面言君失至於辭或迫切而君怡然受之少無忤色從遊益親此爲君之所長而人不可及者也且凡與人交信而有情款明村羅顯道以此深與之庚辰除四山監役西坡吳公道一長西銓所擧也越三年癸未考滿當遷而以六月十一日病卒葬于尼山酒谷負卯之原君凡三娶楊氏閔氏田氏有二女長適金槹次適尹憲一男曰森擢武科今爲嘉善慶尙左兵使又有庶子松金橰男曰最魯女婿曰尹溫森一男希天松三男君沒後十年辛卯以子貴贈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三配皆封 贈貞夫人森將竪墓碣請余爲文余老病昏塞不能爲而森亦幼從余學固請不己雖數行語必欲得余筆以刻不得終辭遂畧叙而銘之曰學而無成官止一命有子克孝膺此榮贈 嗟君慕善乃其平生隆師親友終始至誠八十老夫强疾題銘庶使後世知有子貞崇禎紀元後再壬寅七月 日立”이라고 쓰여 있다.
또한 뒷면에는 “先人曾銘公墓有軼事一焉 己巳 中宮遜位吳公斗寅朴公泰輔等諫而死 公繼之陳疏 辭益愷切 雖見遏於喉司 聞者奇之森今爲刑曹參判兼摠戌使希天 成進士名公之屈可伸於後矣森將堅墓石俾行敎追記謹書于下方如此時壬 寅五月上澣也 通政大夫戶曹參議知製 敎尹行敎謹記 坡平尹東源 敬書”라고 쓰여 있다.
[현황]
비신을 대리석으로 써서 200여 년 지나는 동안 빗물에 녹아 자획이 조금 훼손되어 있으나 묘비 주위를 문중에서 정화하여 잘 보존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사길 묘비는 묘비의 형식과 비문의 양식이 조선 후기의 전형적인 모습을 잘 갖추고 있다. 비문의 찬·서·자가 모두 훌륭하여 서예 자료로서 귀중한 위치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