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012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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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地名 |
영어공식명칭 | place name |
분야 | 지리/인문 지리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
시대 | 현대/현대 |
집필자 | 김성환 |
[정의]
땅에 붙여진 이름. 즉, 땅을 인식하고 그 땅과 다른 땅을 구별하기 위하여 사람들이 붙인 이름.
[개설]
사람이 땅에 정착하여 생활하기 시작하면서 생활의 편리함을 얻기 위해 자연적 환경이나 지형의 특색, 또는 당시의 산업이나 사회제도 등의 인문적 특성을 반영하여 땅에 각각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 그리하여 지명에는 사람들의 사상, 의지, 생활모습, 언어, 풍속, 도덕, 종교 등이 표현되어 있으며, 당시의 의식구조, 전통, 습관, 역사, 경제, 문화 발달 과정 등을 알 수 있는 문화적 유산 중 하나이다.
[지명의 특징]
지명이 내포하고 있는 특성은 크게 다섯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지명에는 역사성과 변천성이 있다. 지명은 오래된 것일수록 역사성을 지니며, 자연과 역사의 흐름에 따라 변화하는 생명의 유기체로서 생활과 문화의 변천, 국어 음운의 변천, 민중의 의식, 시대사조와 주위 환경에 따라 개칭되거나 소멸하는 변천성이 있다.
둘째, 지명에는 고착성과 보수성이 있다. 지명은 사회집단의 계약으로서 일단 이름이 붙여지면 시대가 변화해도 그대로 사용되는 성질이 있다. 지명에 옛말이 많이 남아 있는 것이나 일상생활에서 잘 쓰이지 않는 말이 지명에 많이 발견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셋째, 지명에는 지역성이 있다. 지명은 사람들에게 특정한 장소를 나타내는 것으로 인식되며, 그 지역의 자연적 혹은 인문적 특징을 잘 나타내 준다.
넷째, 지명은 중요한 지도의 요소이다. 지명이 없으면 지도를 만들어도 이용할 수가 없고, 지명도 지도가 없으면 그 위치가 어느 곳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없다. 따라서 지도는 지명을 구체적으로 배치하여 그 위치와 범위를 정하여 주는 시각적인 인식도(認識圖)라 할 수 있다.
다섯째, 지명에는 중층성이 있다. 같은 지역이라 하더라도 지명이 중첩되어 사용되는 경우가 있다. 산, 전답, 못 이름 따위는 가장 기본적인 지명으로 제1단계적인 것이며, 자연마을은 제2단계적인 것으로 그 위에 중첩되어 있고, 행정동명은 제3단계로 중첩되어 있다. 세계 각국에서 지명에 대한 조사·연구가 점점 더 많이 이루어져 지명학(toponymy)이 새로운 학문분야로 발전되어 가고 있으며, 사라지거나 변질되어 가는 지명을 회생·보존시키려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고 있다.
[성남시 지명의 개설]
성남시는 2003년 현재 수정구, 중원구, 분당구 3개구 44개 행정동으로 편재되어 있다. 성남시의 ‘성남’은 말 그대로 성의 남쪽, 곧 남한산성의 남쪽을 뜻하는 이름으로 풀이된다. 실제로 성남은 남한산성의 남서쪽에 자리잡고 있다. 성남을 예전에는 ‘성나미’로도 불렀다고 하며, 이를 표기할 때 ‘성남(城南)’으로 썼다고 한다. ‘성남’이란 지명은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광주목 누정조의 이문형(李文炯)[?~1466]이 쓴 『압구정기(狎鷗亭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성남’이라는 지명은 위의 기록과 유상운(柳商運)[1636~1707]의 “7월에 성남(城南) 옛 집에 갔다가”라고 한, 묘갈명(墓碣銘)의 구절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런 점은 성남이라는 지명이 오래 전부터 사용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성남=성나미’와 같은 사례는, 오늘날 성남시 분당구 삼평동의 ‘성나미’ 마을도 부르기는 ‘성나미’이고 쓰기는 ‘성남’이며,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전라북도 남원시 보절면,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등 여러 곳의 지명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여기서의 ‘나미’는 내미, 너미, 네미 등과 함께 ‘너머’의 의미를 포함한 것으로, 산등성이, 성, 고개 등 ‘높은 곳의 너머’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이다. 남한산성에 대한 1595년의 수축과 1626년의 증개축보다 100년 이상 앞선 시기에 ‘성남’이라는 명칭이 있었다는 것은 ‘성나미=성남’의 표기가 그 이전부터 사용되어 왔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따라서 ‘성남’은 성의 남쪽, 성 너머 저쪽, 재 너머 저쪽(성=잣=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이것은 평지성의 경우 ‘성안’과 ‘성밖’이 서로 대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성안(중부면 산성리)’과 ‘성 너머(나미)’가 서로 대응하는 것으로도 풀이할 수 있다.
[수정구(壽井區)]
수진동(壽進洞)에서 수자와 복정동(福井洞)에서 정자를 취하여 지어진 명칭이다.
성남시의 수정구는 행정동 16동(신흥1동, 신흥2동, 신흥3동, 태평1동, 태평2동, 태평3동, 태평4동, 수진1동, 수진2동, 단대동, 산성동, 양지동, 복정동, 신촌동, 고등동, 시흥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신흥동(新興洞)]
1973년 성남출장소가 성남시로 승격되면서 탄동의 일부를 갈라 독립시킬 당시, 시정자문회의에서 ‘새롭게 부흥하자’는 뜻으로 현 신흥1동, 신흥2동, 신흥3동 지역을 신흥동이라 칭하게 되었다
[태평동(太平洞)]
1970년대 수도권 정비 일환으로 광주대단지가 건설되면서 서울지역 주민들이 집단 이주하였고, 그 결과 1973년 성남출장소가 시로 승격됨에 따라 새롭게 동을 창설하였는데, 당시 시정자문회의에서 ‘근심 걱정이 없는 태평한 지역을 만들자’는 취지에서 붙인 이름이다.
[수진동(壽進洞)]
이 지역에 조선시대 세종대왕의 7째 아들인 평원대군(平原大君)이 사망하자 영장산(靈長山) 남쪽에 장사지내고 그 묘소를 관리하는 수진궁(壽進宮)을 지은 데서 비롯된 것으로, 궁말, 궁촌, 수진궁, 수진동, 수진리 등으로 불리우다가 성남시로 되면서 수진동으로 된 것이다.
[단대동(丹垈洞)]
‘단대리’라는 지명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는 ‘탄리(炭里)’와 함께 개발이전 성남지역에서 가장 많이 불리워진 지명이다. 과거 단대리는 현 단대동, 금광동, 중앙동, 은행동 전역 및 신흥동 및 성남동 일부까지 포함하였다. 일설에는 1973년 시승격 당시 탄리에서 남한산성으로 가려면 고개하나를 넘어야 하는데 그 고개의 흙이 붉었으므로 단대골 또는 던데, 단대동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나, 이미 조선시대 문헌에 단대(丹坮)라고 기록된 것으로 보아 그 근거는 미흡한 것으로 보인다.
[산성동(山城洞)]
과거 단대동 및 창곡동 일부가 병합된 지역으로서 1983년 10월 단대1동으로부터 분동되어 단대4동으로 불리웠다가 1989년 5월 성남시의 구제(區制) 실시로 수정구 산성동으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동명 개편시 남한산성(南漢山城) 진입로인 산성로와 접해 있고 단대공원과 단대체육공원, 산성소공원 등 녹지공간이 많아 붙은 이름이라고 한다.
[양지동(陽地洞)]
과거 단대동의 ‘양지말’ 지역으로서, 명칭의 유래는 단대천(현재는 복개되어 중앙로로 바뀜)을 경계로 은행동 위편에 위치하면서 양지바른 곳에 있다 하여 양짓말이라고 불렀다 전한다.
[복정동(福井洞)]
‘복우물(福井)’에서 유래한 말인데, 현 복정동 정수장 뒤편 안골로 가는 길 또는 길과 밭 사이에 큰 복우물이 존재하였기 때문이라고 하며, 일설에는 영장산(靈長山)의 복정동 쪽 상봉에 있는 칠성대의 감로천(甘露泉)이 복우물이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신촌동(新村洞)]
‘새로 생긴 마을’이라는 뜻으로 을축년(1925) 대홍수 때 삼전도(三田度)[지금의 송파 일대]가 침수된 후 이곳에서 이주하여 온 수재민들로 이루어진 마을이라 ‘새마을’, ‘새말’ 등으로 불리다가 이를 한자화 하여 만든 이름이다.
[고등동(高登洞)]
크게 ‘고산동(高山洞)’과 ‘등자리(登子里)’로 구분되며, 각 마을의 ‘고’자와 ‘등’자를 따서 고등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고산동의 주막거리는 6·25전쟁 이후 주막거리에 술집이 새로 생겨 새술막이란 이름이 붙었고, 인릉산 밑에 있는 등자리는 덕수이씨 집안에서 과거에 급제하는 경사가 잇따라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시흥동(始興洞)]
용인에서 말죽거리(지금의 양재동)를 거쳐 서울로 가던 길가에 살던 주민들이 청계산 일대에 숨어 살던 도적 떼를 피하여 현재 위치로 이주하여 형성된 마을이다. 주민들은 이제부터는 도적의 피해가 없어지고 새로 흥할 수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시흥리라고 불렀다고 한다.
[중원구(中院區)]
중동(中洞)[현 중앙동]의 중자와 상대원동(上大院洞)의 원자를 취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중원구는 행정동 10동(성남동, 중앙동, 금광1동, 금광2동, 은행1동, 은행2동, 상대원1동, 상대원2동, 상대원3동, 하대원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성남동(城南洞)]
과거에 남한산성(南漢山城)의 남쪽이라는 뜻으로 성나미 또는 성내미라는 이름으로 불리웠으며, ‘성남(城南)’이라는 지명은 이를 한자로 표기한 것이다. 성남동 지역은 광주대단지 및 성남시가 개발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서 가장 먼저 개척되었던 지역이기 때문에 성남시의 상징이 되어야 한다는 이유로 시의 지명을 그대로 인용하여 동명으로 삼았다.
[중앙동(中央洞)]
처음 명칭은 중동으로, 서울시가 광주대단지 건설사업을 시행하여 인구가 유입됨에 따라 1973년 성남시로 승격될 당시 성남의 가장 중심부에 위치하였다고 하여 새롭게 지은 이름이다. 2011년에 중앙동으로 개칭되었다.
[금광동(金光洞)]
지명의 유래는 ‘금광리’라는 자연취락의 이름을 살려서 지은 것이다.
금광리에는 고려 말 불사이군의 절개를 지킨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김약시(金若時)가 은거하다가 별세하였는데, 그 자손이 벼슬에 오르고 집성촌을 이루어 세상 사람이 광산김씨(光山金氏)들이 사는 마을이라 하여 금광리라 칭하였다 한다.
[은행동(銀杏洞)]
이 지역 정자나무인 은행정(銀杏亭)에서 유래한다. 은행시장 뒤편에 높이 30m, 둘레 6m, 수령 약 300년 정도의 은행나무가 있는데 여름이면 정자나무 역할을 하기 때문에 ‘은행정’이라 불리운다.
[상대원동(上大院洞), 하대원동(下大院洞)]
상대원(上大院)과 하대원(下大院)이란 명칭은 이 지역에 고려 중엽인 1225년경에 사원(寺院)이 건립되어 원터 또는 대원이라 부르다가 원터 위쪽을 상대원, 아래쪽을 하대원이라 한 데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또한 일설에는 고려 말의 학자 이집(李集)의 서원이 있는 곳을 ‘하대원(下大院)’이라고 한 데 대하여 조선 중기의 문신인 송언신(宋言愼)의 서원이 있었던 지역을 ‘상대원(上大院)’이라 하였다고도 전한다.
[분당구(盆唐區)]
‘분당’이란 명칭은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만들어진 합성지명으로, 그 전에는 ‘분당’이란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다. 그 해에 일제가 전국의 부, 군, 면, 리, 동을 일제히 통폐합할 때 이곳에 있었던 분점리(盆店里)[동이점, 장터]와 당우리(唐隅里)[안당모루, 새당모루]를 합하고, 두 마을의 머리글자를 따서 ‘분당(盆唐)’이라 하였다. 그러나 이는 합성지명의 의의가 갖는 「결합지역 땅이름의 보존적 합성」을 간과한 오류를 범한 것이다.
즉, ‘당우리(唐隅里)’의 ‘당(唐)’자는 본래 ‘집 당(堂)’자였는데 1906년에 ‘당(唐)’으로 바뀐 후 1914년에 ‘분당(盆唐)’이 되었으나 그 이전에는 ‘당우리(堂隅里)’로 확인되고 있다. 규장각에 소장된 조선시대 관청의 공식문서인 『경기도 광주군 양안(量案)』에도 ‘당우리(堂隅里)’로 표기되어 있다. 따라서 분당(盆唐)은 ‘분당(盆堂)’으로 바로 잡아야 할 땅이름이다.
분당구는 행정동 18동(분당동, 수내1동, 수내2동, 수내3동, 정자1동, 정자2동, 정자3동, 서현1동, 서현2동, 이매1동, 이매2동, 야탑1동, 야탑2동, 야탑3동, 판교동, 금곡동, 구미동, 운중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수내동(藪內洞)]
‘수내(藪內)’라는 이름은 이곳의 ‘숲안’ 마을에서 비롯된 이름인데, 숲 또는 늪을 뜻하는 ‘수’와 안을 뜻하는 ‘내’자를 취한 것이다. 이 ‘숲안’이라는 이름은 조선 숙종 때 청주목사를 지낸 이병익이 이곳 마을 앞 분당천(수내)변에 숲을 가꾸었으므로 ‘숲안’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하였고, 일설에는 경종때 이병태(李秉泰)[1688~1758]가 부락 앞에 숲을 가꾸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인근 탄천(炭川)의 우리말 표기가 ‘숯내’이며 지금 분당천(탄천의 지류)을 이 지역(숲안의 역말 등)에서 ‘수내’라 하였던 점 등을 고려할 때, 이 지역 지명이 분당천=수내, 탄천=숯내와 관련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정자동(亭子洞)]
이 지역이 조선 중기 이후 왕족인 전주이씨의 세거지가 되면서 붙여진 이름이다. 조선 제 9대 임금 성종의 아들(12남) 무산군(茂山君)의 제 5자인 태안군(泰安君) 이팽수(李彭壽)[1490~1525]의 묘역과 그 자손들이 터를 잡았다. 태안군의 증손이 되는 이경인(李敬仁)[1575~1642]은 이천부사겸 광주병마진관 등을 역임하였는데 병자호란의 치욕을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내놓고 이곳 탄천 변에 내려와 정자를 짓고 한운야학(閑雲野鶴)으로 소일하였다. 그 후 그가 즐기던 ‘정자가 있는 마을’란 뜻의 ‘정자리’가 되었다.
[서현동(書峴洞)]
광주군 돌마면 돈서촌, 양현, 통로골 등의 마을로 이루어진 곳으로, 1914년 일제에 의한 전국의 행정구역 통폐합때 돈서촌(遯書村)에서 ‘서’자를 취하고 양현리(陽峴里)에서 ‘현’자를 취하여 ‘서현리’라 부르게 된 곳에서 유래하였다. 양현리는 ‘볕고개’라 부르던 곳으로 글자 그대로 ‘햇볕이 잘 드는 고개’로 풀이되어 ‘양현리’가 되었다고 하며, 돈서촌에는 어느 선비가 이곳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서당을 짓고 아이들을 가르치면서 벼슬길에 나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이매동(二梅洞)]
'이매(二梅)’라는 이름의 내력에 대하여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는, 이곳에 있던 탄천변 들판을 ‘이무술들’이라 하는데, 이 마을이 풍수지리상 매화꽃이 떨어지는 「매화낙지형(梅花落地形)」의 명당이므로 ‘이무술’과 ‘매화낙지’를 취하여 이매동이라 하였다는 설이다.
두번째는 동쪽의 영장산(413.5m)을 ‘매지봉’이라고도 하는데, 이 줄기에 크고 작은 두개의 매지봉(梅址峰)이 있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세번째는 이무기와 관련된 전설로 옛날 탄천 변 방죽에서, 주민들이 천년 만에 용이 되어 하늘로 승천하려던 이무기를 잡아 죽였는데, 그 저주를 두려워한 사람들이 위령 승천제를 지냈으나 제사상 주위가 온통 피로 물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그날 밤 주민들 꿈에 이무기 화신인 백발노인이 나타나 동민들의 정성에 보답하여 저주를 풀었다고 하고, 제를 지냈던 자리에 매화나무 두 그루가 자라났으므로 ‘이매동’이라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진주 유씨 세보』에 ‘임의곡(任意谷)’또는 ‘이매곡’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임의술’로 불리웠다는 설도 있다.
[야탑동]
‘야탑(野塔)’이라는 명칭은 1914년 일제에 의해 처음 명명되었는데, 오야소(梧野所)의 '야' 자와 상탑, 하탑의 '탑' 자를 취한 것이다. 오야소란 이름은, 원래 마을 앞의 들이 넓고 주위에 오동나무가 많았기 때문에 '오동나무 들마을'이라고 하다가 오동나무 열매가 많이 열리는 ‘오야실(梧野實)’로 변하였고, 그것이 다시 ‘외실’ 또는 ‘왜실’로 줄었다가 한자로 표기할 때 오야소로 기록한 것이라고 한다. 또 상탑, 하탑의 ‘탑’은 그 정확한 축조 및 해체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대략 300여 년 전 이 지역에 탑이 있어 탑골이라 부른 것에 유래한다고 한다.
[판교동(板橋洞)]
명칭은 마을 한복판으로 국사봉 자락에서 동쪽으로 흘러내려 탄천에 합류되는 운중천이 흐르는데 여기에 넓은 판자로 다리를 놓은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널다리’로 부르다가 ‘너더리’로 변했고 이것을 한자로 ‘판교(板橋)’라고 표기한 것이다.
[금곡동(金谷洞)]
‘금곡(金谷)’ 지명은 토박이말 ‘쇠골’, ‘쇳골’이라는 이름에서 비롯되었다. 이 지역이 과거 금(金)을 채취하는 광산이 있어서 쇳골이라고 불렀고 그것을 한자로 표기하면서 금곡리(金谷里)라고 한 것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실제로 이 지역에서 금이 생산되었는지의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구미동(九美洞)]
동명 유래는 설이 구구하여 어느 설이 정확한지 알 수 없다. 탄천이 굽이쳐 흐르는 곳에 마을이 위치하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일설에 의하면 마을 뒷산이 거북이 형국이라 구미(龜尾) 또는 구산(龜山)이라 한데서 연유되었다 한다.
또한 전하는 바에 따르면 이 지역이 김해김씨, 밀양박씨, 문화유씨 등의 아홉 성씨가 각각 아홉 개의 취락을 이루어 살아서 구성리(九姓里)라 하였는데, 그 성씨들의 음이 모두 다르므로 ‘구음(九音)’이라 하였고 또한 그들이 서로 화목하게 살고 사람들도 순박하여 ‘구순(九順)’으로 부르다가 아름다운 일이 많다하여 구미리(九美里)라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운중동(雲中洞)]
‘운중(雲中)’이라는 이름은 산에 항상 구름이 머물러 있다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914년 일제에 의하여 새로 이름이 만들어졌으며, 그전에는 중산운리(中山雲里), 산운리(山雲里), 하산운리(下山雲里) 등으로 이루어진 마을인데, 이때 산운리와 중산운리에서 한 글자씩 취하여 '운중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