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010255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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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李忠元扈聖功臣敎書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기록 유산 |
유형 | 문헌/문서 |
지역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운중동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윤혜숙 |
문화재 지정 일시 | 1986년 10월 15일 - 이충원 호성공신교서 보물 제874호 지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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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 지정 일시 | 2021년 11월 19일 - 이충원 호성공신교서 보물 변경 지정 |
성격 | 교서 |
관련인물 | 선조|이충원(李忠元) |
용도 | 상장과 훈장 |
발급자 | 선조 |
수급자 | 이충원(李忠元) |
발급일시 | 1603년(선조 37) 10월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소장처 주소 | 경기도 성남시 분당구 하오개로 323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
[정의]
경기도 성남시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는 교서.
[개설]
임진왜란(壬辰倭亂) 평정에 큰 공훈을 세운 이들에게 내려진 훈호(勳號)는 호성(扈聖) ·선무(宣武) 두 가지로 나누고 있는데, 왕을 수종(隨從)한 사람을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정왜제장(征倭諸將) 및 원병과 양곡 요청을 위해 명(明)에 왕래한 사신을 선무공신(宣武功臣)에 책록(策錄)하고, 또 각 3등으로 나누어 훈호(勳號)와 상사(賞賜) 등을 다소 달리하였다.
조선이 개국한 이래 태조 1년(1392)의 개국공신(開國功臣)부터 공신의 마지막인 영조4년(1728)의 분무공신(奮武功臣)에 이르기까지 약 340년간에 무려 28개의 공신이 책록되었는데, 그 중에 호성(扈聖)·선무(宣武) 양공신(兩功臣)은 왜적(倭敵)을 물리치고 국토를 회복하였다는 점에서 중요시 되고 있다.
이충원(李忠元)의 자는 원보(元甫), 호는 송암(松庵) 또는 여수, 본관은 전주이며, 덕천군(德泉君) 후생(厚生)[정종의 10자(子)]의 현손(玄孫)이다. 1566년(명종21)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壯元), 수찬(修撰)·대간(臺諫)·승지(承旨) 등을 지내고,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형조참의(刑曹參議)로 왕을 호종하고 돌아와 형조참판(刑曹參判)에 특진되었다. 그 뒤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한성판윤(漢城判尹)·형조판서(刑曹判書)를 역임하고,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으로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에 봉해졌다. 형판(形判)으로 있을 때 명(明)의 주사(主事) 정응태(丁應泰)가 우리나라를 명에 무함(誣陷)할 때 이를 변명하는 정문(呈文)을 흠차감군(欽差監軍)에게 보내기도 하였다. 시호(諡號)는 충헌(忠憲)이며 영정(影幀)이 전한다. 문장과 글씨에도 뛰어났다.
[제작발급경위]
공신교서(功臣敎書)는 1604년(선조 37년) 10월에 국왕이 임진왜란 때 선조의 파천(播遷)에 호종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인 완양부원군(完陽府院君) 이충원(李忠元)[중종 32년, 1537∼1605]에게 내린 교서(敎書)이다. 이충원의 공적 사례, 공신에 대한 포상과 특전, 공신의 명단, 사실증명 등을 차례로 적고 있는데, 이충원은 2등 12번째로 기록되어 있다.
[형태]
두꺼운 선지(鮮紙)에 명주(明紬)를 접착하여 만든 폭 36㎝, 길이 230㎝의 두루마리이다. 전부(前部)와 후미(後尾)의 공백된 부분을 포함한 길이는 총 298.8㎝인데, 그 중에 전부 36.4㎝, 후미 22㎝ 가량은 감색(藍色)이며 후미에는 목재(木材)로 만든 길이 43.6㎝, 지름 2.4㎝의 축(軸)이 있다. 전곽(全郭)이 주사란(朱絲欄)으로 상하는 34.4㎝이고 매간(每間)은 2.5㎝이다.
[구성/내용]
해서(楷書)로 총 60행에 걸쳐 묵서(墨書)되어 있고 자수는 일정치 않다. 말미(末尾) 년. 월. 일 위에 정방형의「시명지보(施命之寶)」란 어보(御寶)가 찍혀 있다. 배면(背面) 우측 하부(右側下部)에 세로 8.9㎝, 가로 3.4㎝ 크기의 양질저지(良質楮紙)를 붙이고 '이정혐(혐)제(製), 한호(韓濩) 서(書)'라고 두 줄로 병서하여, 이 공신교서(功臣敎書)의 제진자(製進者)와 필사자(筆寫者)를 밝히고 있다.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교(敎) 충근정량교절협책호성공신(忠勤貞亮效節協策扈聖功臣) …… 이충원서(李忠元書)’란 제하(題下)에 대략 5개 문단으로 구성되었다.
첫째, 공신의 공적사례(功績事例)로 이충원의 천품(天稟) ·자질과 탁월한 문예(文藝), 역관사실(歷官事實)을 서술하고, 다음에 임란 때 진충(盡忠)하여 국난을 회복한 공을 찬양하고 있다.
둘째, 공신의 특전으로 호성(扈聖) 2등인 이충원에게 내려지는 특전 및 상사를 구체적으로 적고 있다. 상사중(賞賜中) ‘표리일단(表裏一段)’은『선조실록(宣祖實錄)』의 상사예규(賞賜例規)에는 없는 것으로 규정(規定) 이외에 특별히 사급(賜給)한 것으로 여겨진다.
셋째, 공신과의 맹서(盟誓)로 왕이 공신에게 국가의 존립과 함께 영원히 휴척(休戚)을 같이 할 것임을 맹세하고 있다.
넷째, 공신의 명단으로 1등에 이항복(李恒福) 등 2인, 2등에 신성군(信城君) 후(珝) 등 33인, 3등에 정탁(鄭琢) 등 53인, 총 89명의 공신명단을 3단으로 적고 있다. 이충원은 2등 12번째에 기록되어 있다.
다섯째, 사실증명(事實證明)으로‘만력삼십이년십월(萬曆三十二年十月) 일(日)’이라 하여 반급(頒給) 연월을 적고 그 위에 어보(御寶)를 찍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의의와 평가]
이 공신교서(功臣敎書)는 임란사연구의 사료인 동시에 이충원의 전기이기도 하거니와, 특히 조선전기 사대명필(四大名筆)의 한 사람인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란 점에서 그 예술적인 가치 또한 높이 평가되어 1986년 10월 15일 보물 제874호로 지정되었고, 2021년 11월 19일 문화재청 고시에 의해 문화재 지정번호가 폐지되어 보물로 변경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