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41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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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場市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충청남도 서산시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지수걸 |
[정의]
충청남도 서산시에서 개항기부터 일제 강점기까지 정기적으로 열렸던 시장.
[개설]
개항기 때 서산 지역의 포구 상업은 어느 정도 발달하였으나, 지방 장시는 대단히 미약하였다. 일제 강점기에 들어서야 상설 점포가 늘어나는 등 서서히 상설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으나, 1930년대 후반까지 기본적으로 재래의 경제 구조로부터 벗어나지 못했다. 상업 활동은 여전히 정기 시장[오일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서산 지역은 부근에 있는 다른 지역에 비해 상업이 부진한 편이었다.
[개항기의 장시]
1908년 서산과 해미의 여각(旅閣) 수는 각각 9개, 5개였으나, 태안에는 여각이 하나도 없었다. 서산 여각의 위치는 오산면 덕지천과 내오산, 율곶면 양대, 인정면 모포, 화변면 대두, 마산면 강당리, 영풍창면 송치, 문현면 방길리, 성연면 평촌 등이었다. 다른 지역의 경우 여각은 상업 중심지에 집중되어 있었던 반면에 서산에는 각지에 하나씩 흩어져 있었다. 이는 이들 지역이 중심지 시장이 아니었음을 보여 준다.
개항기 서산, 태안, 해미 지역의 상업은 대체로 예산장이나 둔포장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다. 특히 당시 예산장은 “팔도 굴지의 회시장(會市場)으로서 안성장을 능가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번성하였다. 개항기 영사관 조사 자료에 따르면, 서산 읍내에서 상업을 영위하던 가구 수는 100여 호, 태안 읍내는 4백여 호, 해미 읍내는 40여 호 정도에 불과했다. 1908년 서산 지역에는 서산 읍내장이 매달 2일과 7일에 열렸으며, 1909년의 한 조사에 따르면 서산장에는 서산, 태안, 면천, 당진 등지에서 생산된 잡곡, 면포, 어물, 도자기, 소, 누룩 등이 모여들어 거래되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의 장시]
일제 강점기 서산의 상권은 크게 예산장에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서산 지역에는 예산장을 중심 시장으로 하여 7개의 면에 각각 정기 시장이 형성되어 있었다. 서산의 대표적인 정기 시장은 서산 읍내장[음력 2일, 7일], 태안 남문장[음력 3일, 8일], 해미 읍내장[음력 5일, 10일], 운산 용장장[1일, 6일], 정미 천의장[4일, 9일], 성연 평리장[5일, 10일], 대산 대산장[5일, 10일] 등이었는데, 이는 모두 면이 관리하는 시장이었다. 이 가운데 서산장과 태안장은 점차 상설 점포가 늘어나는 등 서서히 상설 시장으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갔다. 1927년 서산 내의 상설 점포 수는 모두 77개였는데, 이 가운데 40여 개의 점포가 읍내에 몰려 있었다.
서산 지역의 상업이 부진하였다는 사실은 5원 이상의 세금을 납부하던 곡물·잡화상의 숫자만을 비교해 보아도 알 수 있다. 곡물·잡화상의 경우 5원 이상의 영업세를 납부하던 상점은 홍성이 21개, 보령은 10개나 되었으나 서산은 단 두 곳뿐이었다. 또한 서산에는 약방과 전당포가 한 곳도 없었으나, 당진에는 약방 6곳, 전당포는 5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