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8005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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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羅谷里胎室 |
영어의미역 | Placenta Chamber in Nagok-ri |
이칭/별칭 | 나곡태실,나실태봉 |
분야 | 역사/전통 시대,문화유산/유형 유산 |
유형 | 유적/유적(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산65 |
시대 | 조선/조선 |
집필자 | 심현용 |
성격 | 태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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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립시기/연도 | 1619년 |
관련인물 | 광해군 |
소재지 주소 |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 산65 |
[정의]
경상북도 울진군 북면 나곡리에 있는 조선 중기 태실.
[개설]
태실이란 왕실에서 자손이 태어나면 의식과 절차를 거쳐 태를 묻은 시설을 말한다. 즉, 태는 태어난 아기의 생명선이며 근원이라 하여 예로부터 소중하게 다루었는데, 특히 조선왕실에서는 아기가 태어나면 전국의 길지(吉地)를 골라 태실을 만들어 태를 묻었다. 태실은 아기 태실과 가봉 태실로 구분된다. 아기 태실은 최초로 설치한 태실이다. 가봉 태실은 아기 태실의 주인공이 왕위에 올랐을 때 아기 태실에 추가로 화려한 석물을 치장하여 가봉을 한 태실이다.
태를 봉안하는 제도는 문헌 기록상 신라시대에 김유신의 태실이 확인되는 것으로 보아 늦어도 신라 때부터는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왕실 장태(藏胎)의 풍속은 『고려사(高麗史)』와 『죽계별곡(竹溪別曲)』 등 고려시대의 문헌 기록에서 많이 나타나고 있다. 그러므로 왕실에서의 태실 제도는 고려시대에 성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왕실 장태의식은 중국에서도 보이지 않는 우리 고유의 풍속이다.
중국에서 태를 땅에 묻는 풍속은 당대(唐代)부터 확인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장태 풍속은 김유신의 태실 기록이 남아 있기 때문에 중국보다는 앞서 있다. 또 『선조수정실록』의 기록에는 “태경지설(胎經之說)은 신라와 고려조간에 시작된 것으로 중국의 옛날 제도가 아니다”고 명시하여 우리나라의 장태 제도가 고유의 풍속인 것으로 전하고 있다.
[위치]
북면 원자력발전소 정문에서 국도 7호선을 따라 삼척 방면으로 4.3㎞ 정도 가면 도로 왼쪽에 ‘나곡4리’라는 표석이 나온다. 나곡리 태실은 나곡4리로 들어서면 태봉마을 바로 앞 검성리로 가는 방향의 태봉교 옆 태봉산 정상에 위치한다. 태봉산 주위에는 좌청룡(左靑龍)과 우백호(右白虎)의 역할을 하는 산줄기가 태봉산을 감싸 안듯이 돌려져 있다.
[형태]
태실이 있는 산봉우리의 정상부는 지름 6m의 원형 평탄지로 되어 있으며, 이곳에 아기 태실비[阿只 胎室碑]가 정상의 북동쪽 방향에 세워져 있다. 이 아기 태실비의 뒤쪽 남서쪽으로 1m 떨어진 곳에는 지름 2m, 깊이 0.5m로 움푹 파인 원형 구멍이 있는데, 이는 도굴에 의한 굴토 흔적으로 보인다.
아기 태실비는 비수(碑首)와 비신(碑身)이 한 돌로 되었으며, 비대(碑臺)는 다른 돌로 만들었다. 비수에는 앙련과 보주가 장식되어 있으며, 앙련의 위쪽에는 연꽃 줄기를 형상화한 조각이 양각되어 연꽃봉오리를 뒤집어서 덮어 놓은 듯하다. 비대는 장방형을 이루고 있는데, 그 윗면은 네모서리 각을 죽여 복련으로 장식되어 있다. 비대의 앞면과 뒷면에는 2개의 안상이, 좌우 양측면에는 1개의 안상이 장식되었다.
아기 태실비의 전체 높이는 168㎝로 비수는 높이 34㎝, 너비 61㎝, 두께 28.5㎝이다. 그 중 보주만의 높이는 10㎝이고, 비신은 높이 91㎝, 너비 52㎝, 두께 20.7㎝이다. 비대는 높이는 43㎝, 너비 91.5㎝, 두께 58.3㎝이다.
비신은 잘 다듬어져 표면이 반질반질하고, 해서체로 쓰여져 있다. 앞면에는 ‘황명만력사십칠년육월이십삼일생왕녀아지씨태실(皇明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生王女阿只氏胎室)’이라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만력사십칠년십일월초사일립(萬曆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立)’이라 기록되어 있다.
한편, 지금은 행방을 알 수 없으나, 이곳에서 태지석이 출토되었다. 태지석은 크기가 세로 27㎝, 가로 27㎝이다. 앞면에는 ‘황명만력사십칠년육월이십삼일해시생왕녀아지씨태(皇明萬曆四十七年六月二十三日亥時生王女阿只氏胎)’라 기록되어 있고, 뒷면에는 ‘만력사십칠년십일월초사일기시장(萬曆四十七年十一月初四日己時藏)’이라 기록되어 있다.
아기 태실비와 태지석의 명문으로 보아 태실의 주인공은 여자 아기로 1619년(광해군 11) 6월 23일 오후 9~11시 사이에 태어났으며, 태는 그 해 11월 4일 오전 9~11시 사이에 묻은 것을 알 수 있다.
[의의와 평가]
조선왕실의 족보인 『선원록(璿源錄)』의 기록에 광해군은 2명의 부인에게서 1남 1녀의 자식을 낳은 것으로 되어 있다. 즉, 문성군 부인 유씨(柳氏)에게서 1598년(선조 31)에 폐세자 질(桎)을 낳았으며, 숙의 윤씨(尹氏)에게서 1619년에 옹주를 낳았다. 숙의 윤씨에게서 태어나 박징원(朴澂遠)에게 시집간 옹주의 출생 연도인 기미년(己未年)은 나곡리 태실의 아기 태실비와 태지석에 나타난 출생 연도와 같으므로 이 옹주가 나곡리 태실의 주인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