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4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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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日帝强占期 |
영어의미역 | Japanese Colonial Period |
분야 | 역사/근현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근대/근대 |
집필자 | 김호동 |
[정의]
1910년에서 1945년까지 일본에 의한 식민 통치가 지속되었던 시기의 울릉도 역사.
[연혁]
1910년 일본의 식민지가 된 우리나라에는 조선총독부가 설치되고, 헌병경찰제도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울릉도의 경우 일본인 나카가와[中川]가 울도군주사로 와서 도민을 다스렸다. 1913년 4월 1일에 울릉도의 하부 행정 단위로 3개면[남면·서면·북면] 9개동[저동·도동·사동·남양동·남서동·태하동·현포동·나리동·천부동]을 두었다.
조선총독부는 1913년 10월에서 1914년 4월에 걸쳐 대대적인 지방제 개혁을 단행하였다. 1913년 12월 29일에 ‘조선총독부령 제111호’를 공포하여 도의 관할 구역과 부·군의 명칭, 위치, 관할 구역을 개칭하여 1914년 3월 1일과 4월 1일부터 일제히 시행에 들어갔다. 이때 울릉도는 경상남도 울도군에서 경상북도 울도군으로 이속되어 지금까지 경상북도의 관할 구역으로 존재해오고 있다.
[도제의 실시]
1915년 5월 1일 ‘조선총독부령 제44호’에 의해 우리 지방 행정제도에 도제(島制)가 처음으로 실시되었다. 원래 섬의 행정은 군수가 관장하고 있었으나 도서 행정의 특수성을 감안하여 제주와 울릉, 두 섬을 대상으로 도제(島制)를 창설했던 것이다.
이 두 섬에는 도사(島司)를 두어 섬 전반의 행정 사무를 관장케 하는 한편 도령(島令)을 발할 수 있는 권한과 함께 경찰 행정까지 겸하게 하였다. 이때 울도군은 도제가 시행되어 울릉도청(鬱陵島廳)을 두었다. 도사(島司)로 치타니 겐사쿠로[茶谷兼作郞]를 두어 경찰서장을 겸임시켜 치안과 행정을 장악하게 하고 도령(島令)을 발할 수 있게 하였다.
[인구의 변천]
한일합방 이후 일본인의 식민정책의 일환으로 울릉도에도 일본인이 크게 증가하였다. 울릉도의 일본인은 1906년 153호 541명, 1907년 175호 616명, 1908년 200호 710명, 1909년 223호 736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한일합방 이후 울릉도의 일본인은 대폭적으로 증가하였다. 1911년 332호 1,192명, 1912년 388호 1,261명, 1914년 428호 1,404명, 1915년 371호, 1,231명의 일본인이 울릉도에 거주하였다.
일본인들은 남면 도동·저동, 서면 태하동·남양동·통구미, 북면 죽암·현포에 집단적으로 거주하였다. 그 가운데 도동에 가장 많이 거주하여 135호 674명이나 되었다.
인류학자인 도리이 류조[鳥居龍藏]의 1917년 울릉도 조사에 의하면 조선인과 일본인을 합한 총 인구수는 10,479명, 호수는 1,892호였다. 그 가운데 조선인의 인구수와 호수가 더 많았다. 그러나 도리이 류조는 “일본인의 세력은 매우 왕성한데 반해 조선인의 세력은 전무하다”고 기록하였다. 그 이유로 ‘조선인이 사는 곳은 주로 골짜기의 상류, 혹은 산의 매우 높은 곳이며, 나무를 불태워 없애고 화전 농사를 짓고 있다. 어업이라는 일은 최근에 하기 시작했으며, 주민의 생업은 주로 농업이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일본인의 경우 농업을 하는 일본인은 적고, 해안에 집이 있으며, 오징어잡이를 하고 있다. 울릉도의 오징어잡이는 꽤 왕성하여, 불과 두세 시간 사이에 10~20원의 돈을 벌기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만약 일본에서 생활이 시원찮은 사람은 이곳에서 오징어잡이를 하면 넉넉하게 생활할 수 있다. 그래서 조선인은 거의 세력이 없으며, 일본인은 세력은 상당히 왕성하다”고 하였다.
[전시 동원]
1938년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켰으며, 1942년에는 진주만을 습격하여 태평양전쟁을 일으켰다. 전쟁의 수행을 위해 식민지 조선에 공출과 징병, 징용이 이루어졌다. 울릉도의 경우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1941년 울릉도에 소개령이 반포되었다. 남자 15세 이상 30세 이하는 군병(軍兵)에, 30세 이상 45세 이하는 보국대(報國隊)에 충용하고, 15세 이하의 어린 아이와 45세 이상의 노약자와 여자는 모두 울릉도에서 소개시켜 영양·청송·영덕군의 3군에 옮겨 살게 하는데, 이듬해까지 반드시 행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이민할 여가가 없었다.
1943년 3월 징병령이 반포되었다. 지원병을 모집하니 굶주림에 어려움을 겪던 도민 가운데 지원하는 자가 있기도 하였다. 1944년에 100여 명을 징발하고, 1945년에 대발병령(大發兵令)으로 20세 이상 30세 이하를 전도에 조사하여 6월을 기약하여 남양군도로 보낸다고 하였다. 그러나 마침 울릉도와 독도 사이의 바다에 소련의 수뢰포(水雷砲)가 많아 연락이 불통되었다가 해방을 맞이하였다.
[독도 관련 내용]
일제강점기 울릉도에 관한 자료 가운데 독도에 관한 문헌 언급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일본 해군성 수로국에서 만든 『일본수로지(日本水路誌)』에 독도에 관한 기록이 나온다.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한국을 식민지로 만들면서 『조선수로지(朝鮮水路誌)』의 편찬을 중단하고 1911년부터 『일본수로지』에 포함시켜 편찬하였다. 그 가운데 1920년의 『일본수로지』의 제10권[상·하 2책]에 조선수로를 넣었다. 그 제10권 상책의 울릉도 바로 다음에 ‘죽도(竹島, Liancourt Rocks)’라는 항목을 넣으면서 “조선인은 이를 독도(獨島)라고 쓰고 내지(內地) 어부는 이를 리앙쿠르도(島)라고 말한다”고 기록하였다.
일본 해군성 수로부는 1933년 해군성의 서지(書誌) 제6호로 『조선연안수로지(朝鮮沿岸水路誌)』를 간행하였다. 그 제1권에서는 아예 ‘울릉도급죽도(鬱陵島及竹島)’라는 항목을 설정하여 울릉도에 이어 독도를 비교적 상세히 설명하였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일제가 조선이 영구히 일본의 영토가 되었다고 간주했던 시기에는 ‘울릉도급죽도(鬱陵島及竹島)’라고 하여 독도를 울릉도의 부속도서로 간주했다는 사실과, 이를 모두 조선 연안에 귀속시켰다는 사실이다. 일본이 독도를 조선동안(朝鮮東岸)과 울릉도로부터 떼어내 『일본수로지』의 오키시마[隱岐島] 다음에 넣어서 설명하기 시작한 것은 독도 영유권에 대한 논쟁이 시작된 1952년 이후부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