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1500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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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洪淳穆 |
영어음역 | Hong Sunmok |
이칭/별칭 | 희세,분계,문익 |
분야 |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경상북도 울릉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박상규 |
[정의]
조선 말기 울릉도 개척을 건의한 문신.
[가계]
본관은 남양(南陽). 자는 희세(熙世), 호는 분계(汾溪). 할아버지는 홍현규(洪顯圭)이며 아버지는 승지 홍종원(洪鍾遠)이다. 아들은 갑신정변을 일으킨 홍영식(洪英植)이다.
[활동사항]
1844년(헌종 10) 증광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 지평·수찬을 지내고 1846년 초계문신(抄啓文臣)에 뽑혔다. 1849년 헌종이 죽자 빈전도감도청(嬪殿都監都廳)이 되었고 부사과를 거쳐 1858년(철종 9) 이조참의로 승진하였다. 1863년 대사헌이 되었으며, 이 해에 고종이 즉위하자 흥선대원군의 신임을 받아 1864년(고종 1) 황해도관찰사가 되었다. 1866년 이후 이조판서·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등 여러 관직을 거친 뒤 다시 이조판서가 되었다. 1867년 예조판서를 역임하고 1869년 우의정에 올랐다. 당시 수구세력 강경파의 거두로서 대원군의 쇄국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지하였고, 1871년 신미양요 때에는 미국에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였다.
1872년 영의정을 거쳐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가 되었으며, 이듬해 최익현(崔益鉉)이 대원군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자 다른 대신 및 대간들과 함께 최익현의 처벌을 주장하다가 대원군이 실각한 직후인 그해 11월 파직되었으나, 다음 달인 12월 영돈녕부사에 복직되고 1875년 판중추부사(判中樞府事)가 되었다. 1876년 일본이 통상을 요청하였을 때 척화론을 펼쳤으며, 1879년 호위대장(扈衛大將)을 겸직하였고, 다시 영돈녕부사가 되었다. 1882년 3월 재차 영의정이 되었다.
1882년(고종 19) 영의정 홍순목은 울릉도는 비옥한 땅이니 백성들을 모집하여 개간하게 해서 5년 후에 조세를 물리면 점차 취락(聚落)을 이루게 될 것이라고 건의하였다. 또한 양남(兩南)의 조선(漕船)들로 하여금 재목을 취해 배를 만들게 하면 사람들이 번성하게 모여들 것이라고도 주장하였다. 도맡아 다스릴 사람이 없어 폐단을 막기 어려우면, 성실하게 일을 주관할 만한 사람을 검찰사에게 문의하여 두고 후일에 진(鎭)을 설치할 뜻을 미리 강구하는 것이 옳다고 청하여 조정의 허락을 받아냈다고 전해진다.
이 해 12월에 단행된 관제개혁 때 총리군국사무(總理軍國事務)를 겸임하였으며, 1883년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한 당오전(當五錢)의 주조를 주장하여 이를 실현시켰다. 5월 총리대신을 겸직하였으며, 9월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다. 1884년 아들 홍영식 등이 주도하는 갑신정변이 일어나 정변은 사흘 만에 실패하고 홍영식이 피살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관직이 삭탈되었으며 이어 자살하였다.
[상훈과 추모]
1894년 갑오경장으로 복관되었다. 시호는 문익(文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