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135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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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完州上雲里- |
영어공식명칭 | Cast iron Strike in Sangun-ri, Wanju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선사/청동기,선사/철기,고대/삼국 시대 |
집필자 | 곽장근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상운리에 자리하고 있는 분묘유적과 생활유적.
[전북지역 최대규모의 분구묘, 분묘유적]
전라북도 완주군 상운리 유적은 용진읍 상운리 산 10번지 및 봉동읍 구만리 산 18번지 일대에 위치한다. 상운리 원상운마을의 북동편으로 해발 35~40m 내외의 구릉지 정상부와 사면부를 따라 전북 지역 최대 규모의 분묘군이 자리하며, 구릉지 안쪽에서는 주거지들도 확인되어 학계의 큰 주목을 받았다. 상운리 유적은 동쪽으로 금남정맥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고, 북쪽과 서쪽으로 소양천과 고산천이 흐르는 전형적인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지형상에 있다. 분구묘는 구릉지의 정상부와 사면부에 있는데 서로 간에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면서 분포하며, 서로 간에 겹쳐지거나 파괴되지 않은 채 조성되어 있다. 다시 말해 분구묘를 만들기 전 공간분할을 계획해 공간을 분류하고 집단 내 서열 관계 혹은 친분 등을 바탕으로 무덤을 조성한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무덤 안에서는 마한 분구묘 내에서 일반적으로 확인되지 않은 단야구를 비롯한 철기 제작에 관련된 공구들이 부장품으로 확인되었는데, 이것은 상운리 분구묘 집단의 특징을 보여주는 고고학 자료로 평가되고 있다. 상운리 주거지도 구릉지와 구릉지 사이 곡간부 및 사면에 분포하면서, 분구묘 안에 묻힌 주인공들과 관련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물들, 즉 철기 제작과 관련되는 특수유물들이 확인되어 상운리가 갖는 원삼국시대 철기 제작집단의 위상을 알리는 자료가 되고 있다.
[마한의 철기제작집단의 수장묘, 상운리 분구묘]
분구묘 유적을 살펴보면 상운리에서는 충청남도 보령시 관창리에서 보이는 초기 형태부터 영산강 유역의 옹관 고분까지 다양한 형태의 분구묘가 발견되었다. 또한 유적 내의 지구별로 분구묘의 형태 및 확장과정이 달라 분구묘의 다양한 구조 및 발전과정을 살펴볼 수 있다. 상운리 유적의 분구묘는 가·나·다·라 지구에서 모두 30기가 확인되었으며, 이 중 26기를 조사했다. 분구 내에서는 점토곽(粘土槨)·목관(木棺) 116기, 옹관(甕棺) 38기, 석곽(石槨) 9기 등 총 163기의 매장시설이 확인되었다. 또한 나 지구와 라 지구에서는 분구묘 외에 단독으로 조성된 목관묘 35기와 옹관묘 5기가 확인되었다.
상운리 분구묘는 해발 35~40m에 이르는 구릉지의 정상부와 사면부에 무리를 지어 집중적으로 분포하는 양상을 보인다. 가 지구의 분구묘는 구릉지 정상부와 북서쪽 사면부에 있는데, 정상부에 위치하는 분구묘가 사면부에 위치하는 분구묘보다 시기적으로 먼저 만들어진다. 나 지구의 분구묘는 구릉지의 정상부에서 북서 사면의 말단부에 걸쳐 분포하고 있다. 나 지구의 서쪽으로는 소양천과 평야 지대가 자리하고 있는데 분구묘들은 주변을 조망하기 좋은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다 지구의 분구묘는 남에서 북으로 뻗어 내려가는 구릉지의 정상부에 동서 방향으로 자리 잡고 있다. 라 지구의 분구묘는 북서-남동쪽으로 뻗어 내려가는 구릉지의 능선부와 남서쪽 사면부에 밀집 분포하고 있다. 분구묘는 조사가 진행된 가·나·다·라 지구 외에도 주변의 동일 구릉지에서 육안으로도 분구를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분구묘의 분포 범위를 통해 볼 때 상운리 유적을 둘러싼 주변 일대에는 대규모의 마한계 분구묘 집단이 오랫동안 정치적 흥망성쇠를 거듭했던 것으로 판단된다.
분구묘 내의 매장시설들은 추가로 동일 분구묘에 시신을 안치하면서 나타나는 분구 내 상하중복(上下重複) 현상을 제외하면, 분구묘 간의 중복이나 파괴 현상은 발견되지 않고 있어, 치밀한 계획성과 연속성을 다시 한번 엿볼 수 있다. 즉 분구묘의 조영과 공간적 배치는 상운리 집단이 자신들의 문화체계와 친족 관계를 확립하고 강화하는 데 있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분구묘에서는 모두 321점의 다양한 토기류가 발견되었는데, 가 지구에서 45점, 나 지구에서 128점, 다 지구에서 4점, 라 지구에서 144점이 나왔다. 토기류는 일반적으로 마한 분묘에서 확인되는 장·단경호류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른 시기의 분구묘에서는 무문토기편(無文土器片)과 두형토기편(豆形土器片)이 주구에서 확인되었다.
상운리 분구묘의 유물 중 특징적인 것은 많은 종류와 수량을 차지하는 철기유물이다. 분구묘 내에 부장된 철기는 총 500여 점에 이르며, 대부분 분구 내 점토곽과 목관에서 출토되었다. 상운리에서 출토된 철기 종류는 단야구류(鍛冶具類), 무기류, 농공구류, 마구류, 기타 철기류 등으로 크게 나눌 수 있다. 고대사회의 단야구는 철기의 제작에 있어 단조가공(鍛造加工)을 목적으로 사용되는 도구 모음을 뜻하며, 오늘날의 대장간에서 사용되는 것들과 형태는 물론이고 ‘단야구를 사용해 철물을 집고 두드리는 행위’ 역시 흡사하다. 상운리 유적에서는 망치(鎚), 집게(鉗), 줄, 철착(鐵鑿), 쐐기, 모루(砧), 톱 등으로 구성된 단야구가 출토되었다. 상운리 유적의 단야구는 망치와 집게가 세트를 이루며 줄, 철착, 쐐기, 모루 등이 부가되는 양상을 보인다. 단야구는 총 20세트가 확인되었으며, 한반도에서 단야구가 확인된 유적 중 가장 높은 밀집도를 보인다.
원삼국~삼국시대의 철 생산은 고대국가 발전의 원동력이며, 분묘에 부장된 단야구는 당시의 생산력과 권력을 반영할 뿐만 아니라 피장자와 철 생산과의 관련을 보여주는 자료이다. 단야구는 대부분 분구 대상부 중앙부에 위치한 중심 점토곽과 목관에 부장되었으며, 이들 매장주체부에서는 철기 유물이 다량으로 출토되었다. 따라서 단야구를 소유한 피장자는 철 생산 기술이나 철 생산을 통제하는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분구묘뿐만 아니라 마을 내에서도 단야의 증거가 확인되고 있어, 단야구의 부장과 취락 내의 철 생산은 깊은 관련이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단야기술은 1차 생산품인 철괴(鐵塊)나 철정(鐵鋌)을 가공해 철기를 생산하는 공정이다. 1차 생산품인 철정이나 철괴는 이동이 가능하므로 특정 지점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제련 공정보다 단야 작업은 작업 공간의 선택에 있어 훨씬 자유롭다고 할 수 있다. 상운리 유적 마을에서는 주거지 내부에서 철정을 가공해 제작한 철부 반제품이 발견되었고, 부뚜막에서 송풍관(送風管)과 철괴형철재(鐵塊形鐵滓)가 출토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볼 때 주거지 내에서 간단한 단야작업과 함께 철기의 수리나 보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
[쇳불을 피워올리다 상운리주거지]
상운리 유적에서는 가 지구에서 3기, 다 지구에서 11기의 총 14기의 원삼국시대 주거지가 확인되었다. 상운리 주거지는 구조와 형태에서 같은 시기 마한계 주거지와 비슷하지만, 유구의 배치 양상이나 출토 유물 등에서 약간의 차이를 보인다. 주거지는 구릉지 사면부에 일정한 거리를 두고 배치되어 있는데, 다 지구 주거지 11기는 해발 35~41m의 구릉지 정상부 및 동·서 사면부에 위치하면서 구릉지 정상부 분구묘를 중심으로 반원형으로 배치되는 특징을 갖는다. 주거지의 평면 형태는 잔존 양상으로 볼 때 방형 혹은 장방형으로 추정된다. 내부 시설로는 네 기둥구멍(四柱孔), 벽구(壁溝), 점토제 노지시설(粘土製爐址施設)이 설치되어 있다. 주거지 내부에서 토기류와 철기류, 토제품, 석제품 등 8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주거지에서 발견된 유물 중 주목되는 것이 철기 유물이다. 상운리 주거지 안에서는 철도끼(鐵斧), 철촉, 철도자, 철정(鐵鋌), 철괴형 철재(鐵塊形鐵滓), 철부 반제품(鐵斧半製品) 등 다양한 종류의 철제품이 확인되었다. 또한 다 지구 3호 주거지에서는 잔존 상태가 양호한 송풍관(送風管)이 1점 확인되었는데, 다른 지역에서 출토된 예는 있지만 대부분 편으로 출토되었다. 주거지 내 부뚜막 주변에서는 송풍관을 비롯해 철괴형 철재, 철부 반제품 등이 출토되어 주거지 내에서 어느 정도의 단야 작업과 함께 철기의 수리나 보수 작업이 함께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된다. 즉, ‘상운리’라는 지명처럼 구름의 위로 올라가는, 구름처럼 보이는 큰 연기가 피어 올라갈 정도로 번창했던 철기 생산 집단들이 거주했던 곳이 아닐까 추측해 본다.
상운리 유적의 주거지에서는 전형적인 마한계 주거지의 특징이 나타나지만, 주거지의 분포 양상과 내부 출토유물로 볼 때 상운리만의 특징도 확인된다. 먼저 주거지는 구릉지 정상부의 분구묘를 중심으로 일정한 거리를 두고 구릉지 경사면 상단부에 중복 없이 독립적으로 있다. 이러한 분포 양상은 이 시기의 주거지가 분묘 유구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위치하며, 주거지는 대부분 무리를 짓거나 복잡한 중복 관계를 보인다는 점과 대조된다. 또한 주거지 내부에서는 철부, 철촉, 철도자, 철정, 철괴형 철재, 철부 반제품 등 다양한 철기류가 출토되었다. 특히 부뚜막 주변에서 출토된 철괴형 철재와 철부 반제품의 존재는 주거지 내에서 단야작업과 같은 철기 생산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이러한 특징으로 볼 때 상운리 주거지는 철기 생산을 담당했던 집단이 거주했던 특수 마을로 볼 수 있다. 주거지의 중심 연대는 내부 시설과 출토 유물 등을 바탕으로 고려했을 때 기원후 4세기~5세기 대로 추정된다.
[가야세력의 철 만경강 내륙수로로 유통]
최근에 만경강 유역에서 삼국시대 산성 및 봉수, 제철 유적이 집중적으로 발견되었다. 전라북도 완주군 동북부에서 탄현봉수 등 최초로 그 존재를 드러낸 8개소의 봉수는 유구의 속성에서 서로 공통성을 보였다. 봉수는 판석형 할석을 가지고 연대를 방형으로 쌓고 그 내부는 깬 돌로 채웠다. 전라북도 완주군 봉림산 봉수에서 상당량의 토기조각이 수습되었는데, 토기조각은 기벽이 두껍고 희미하게 승석문이 시문된 회청색 경질토기편으로 6세기를 전후한 시기로 추정된다. 금남정맥 산줄기를 넘어 만경강 유역에서 진안고원의 장수군으로 향하는 교통로를 따라 봉수가 선상으로 배치되어 있다. 그리고 산성 주변에는 봉수의 연대와 동일하게 성벽을 쌓은 산성들이 자리해 봉수와의 긴밀한 관련성을 보였다. 아직까지 산성 및 봉수를 대상으로 한 차례의 발굴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그 축성 주체를 단정할 수 없지만 일단 장수 지역 가야세력으로 유추해 두고자 한다.
만경강 유역에서 가야와 관련된 유물은 토기류와 철기류가 있다. 진안고원으로 향하는 교통로와 만경강 내륙수로가 교차하는 완주 배매산성·구억리산성에서 소량의 가야토기편과 익산 등용리에서 가야토기가 나왔는데, 이를 근거로 만경강 유역에 잘 구축된 교역망을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이 이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가야계 판상철부는 유적의 위치에 따라 유물의 조합상에서 현저한 차이를 보였다. 전라북도 완주군 용진읍 상운리에서는 단야도구와 판상철부가 서로 혼재된 상태로 출토되었는데, 전북 동부지역에서 생산된 철이 이곳에서 2차 가공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반면에 완주 신포·장포에서는 판상철부 등 다양한 철기류가 공반되어, 전북 동부지역의 철이 만경강 내륙수로로 널리 유통되었음을 방증해 주었다. 아직 가야와 관련된 유적을 대상으로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속단할 수 없지만 만경강 유역에는 전북 동부지역에서 생산된 철의 생산과 유통을 주도했던 세력집단이 있었을 것으로 추론해 두고자 한다.
2017년 11월 25일에는 1,500년 전 백두대간 속 전북 동부지역에 기반을 두고 가야계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가야세력을 하나로 묶어 ‘전북가야’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때 ‘전북가야’는 학술적인 의미가 가야의 존재를 알리기 위한 대중적이고 홍보적인 의미만을 담고 있었음을 밝혀둔다. 삼국시대 때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의 위상과 그 역동성을 세상에 널리 알리고 후손들에게 ‘전북가야’에 대한 자긍심을 고취하기 위해 영남·호남 사람들이 오갔던 화합의 무대인 백두대간 치재에 ‘봉수왕국 전북가야’ 기념탑도 세웠다. 그리고 전북 동부지역 가야세력의 고총과 제철 유적, 봉수 및 산성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한 학계의 관심과 행정당국의 지원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동시에 전북 동부지역 가야문화유산을 역사교육의 장과 영호남 화합의 무대로 활용하기 위한 보존대책 및 정비방안도 마련되고 있다. 전북 동부지역에 200여 개소의 제철 유적과 90여 개소의 봉수를 남긴 전북 동부지역 가야사가 올곧게 복원될 날이 기다려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