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700137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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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全羅道天主敎-發源地-全國最初-韓屋聖堂-聖堂 |
영어공식명칭 | A Chonami that is the epicenter of Jeolla-do Catholicism and a Doejae Catholic Church that is a traditional Korean-style House Catholic Church for the first time on a nationwide |
분야 | 종교/기독교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전라북도 완주군 |
시대 | 조선/조선 후기,근대/개항기 |
집필자 | 최진성 |
[정의]
전라북도 완주군에 있는 전라도 천주교 발원지 중 하나인 초남이와, 전국 최초의 한옥 성당인 되재성당.
[개설]
초남이에서 천주교를 전파한 유항검의 행적을 살펴봄으로써 초남이가 성지가 되는 과정을 살펴볼 수 있으며, 전국 최초로 한옥 성당이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에 세워지는 과정을 통해 이 지역이 갖는 교회사적, 또는 종교 지리적 의미를 찾는 계기가 될 수 있다.
[1]전라도 천주교의 발원지 초남이
(1) 유항검의 입교와 그의 집안
전라도에서 처음으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인 사람은 유항검과 윤지충이었다. 이들은 이종사촌지간이었으며, 비슷한 시기에 천주교를 연구하는 조직을 스스로 찾아가 신앙을 받아들였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 중 먼저 세례를 받은 사람이 유항검이라서 그를 전라도의 사도라고 부른다. 전라도 천주교는 유항검을 통해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을 중심으로 전라도 남쪽 지역에 설립되고, 윤지충을 통해 전라도 북부 지역인 진산[현 충청남도 금산군]에 교회가 세워졌다. 유항검의 본관은 경상남도 진주시로 그의 가문은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한 세도가의 집안이었다. 유항검은 1754년 전주부 이서면 초남이[현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남계리 초남마을]에서 태어났다. 그의 어머지 안동권씨는 남인의 젊은 선비들이 추앙하던 녹암(鹿菴) 권철신처럼 권근(權近)의 후손이다. 권씨 부인은 권상연의 고모로, 권상연은 유항검의 외종사촌이다. 유항검의 본가와 외가는 물론, 처가에 이르기까지 모두 남인이었다. 그는 윤지충과 이종사촌간이고, 권상연과는 외종사촌간이었다. 유항검이 초남이에서 안정된 생활을 할 때, 경기도 양근에서는 권철신의 집에서 남인 소장 학자들이 모여 서양 학문을 열심히 공부하고 있었다. 이 소문이 초남이까지 전해지자 유항검은 양근까지 찾아가 이들에게서 천주교를 알게 되어 이승훈으로부터 ‘아우구스티노’라는 세례명으로 세례를 받아 전라도 최초의 전파자가 되었다. 당시에는 전교활동을 제대로 할 수 없던 때라서 자기의 가족, 친척과 친지, 노비, 마름, 작인, 문전 식객 등 서로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에게 몰래 전교했다. 이를 통해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면 초남이를 중심지로 전주, 금구, 김제, 영광 등에까지 천주교가 전해지기 시작하였다. 유항검의 재산 규모는 전라북도 완주군 이서, 금구, 김제, 여산 등지의 10여 곳에 분산되어 있을 정도로 재산이 많았다고 한다. 1908년에 유항검의 손자라고 자칭하는 유길로(柳吉老)가 나타나 정부가 몰수했던 조상의 토지를 환수하겠다고 나서면서 밝혀진 것에 의하면, 당시 전라북도 전주군에 소재한 전답만 1,500마지기였고, 비슷한 규모의 토지들이 적어도 10개 군에 흩어져 있었다. 이를 계산하면 15,000마지기[9,900,000㎡]나 되는 토지였다. 유항검이 거느린 가속을 통해 그의 재산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일부밖에 파악되지 않았지만, 그의 가속 중 천주교와 연루돼 형벌을 받은 사람은 가정교사 1명, 마름(舍音) 4명, 노(奴) 4명 비부(卑父) 7명, 비(婢) 3명, 작인(作人) 2명이 처형을 당했고, 노비 13명, 마름 4명, 작인 1명이 유배되었다.
(2) 유항검과 가성직제도(假聖職制度)
당시 천주교 지도자들은 성직자가 없으면 교회가 유지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1786년 봄 신도들과 협의하여 덕망이 높은 신도 10명을 뽑아 가성직제도를 만들었다. 이승훈은 중국 교회가 교계제도에 의해 운영되고 있음을 목격하고 스스로는 신부로 선출되고, 권일신, 홍낙민, 최창현, 이존창, 유항검 등을 신부로 임명하였다. 그런데 유항검은 고향에서 동생 유관검과 함께 천주교 서적들을 철저하게 검토하던 중 결혼한 사람이 사제직을 수행하면 독성죄(瀆聖罪)[하느님께 봉헌된 거룩한 것을 더럽히는 죄]를 범한다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1787년 봄에 이승훈에게 보고하였다. 이 편지를 받자마자 이승훈은 모든 지도자에게 이 사실을 전하여 성사(聖事)의 집전을 못 하도록 하였다. 이후에 유항검은 이승훈에게 밀사를 북경교회에 파견하여 오류를 범한 가성직제도에 대하여 전하고 그곳 선교사들의 지시를 받도록 하였다.
(3) 밀사들의 북경 파견과 선교사 청원
권일신의 지도를 받고 입교한 여주 양반 출신의 윤유일은 성사 집전이 독성죄가 된다는 사실을 지적했던 유항검의 편지와 다른 교우들의 편지를 갖고 1차로 1789년 10월에 북경으로 떠났다. 북경교회의 선교사들은 윤유일 편에 보낸 조선교회의 편지 내용에서 약 4,000명이라는 신자가 있는 조선교회의 존재를 알았지만, 국경의 감시가 심하여 선교사를 당장 파견할 수 없음을 알려주었다. 하지만 조선교회 측은 성사를 통해서 구원을 받으려면 선교사를 모셔오도록 하는 것이 가장 중요함을 알게 됨으로써 선교사 청원을 적극적으로 요구하였다. 그래서 윤유일은 1790년 7월에 다시 북경으로 파견되면서 선교사의 파견과 함께 이들의 입국 때 서양의 큰 배(大舶)를 보내주도록 요청하여 일단 선교사 1명을 파견해준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당시에 조선 교우들은 선교사의 교통수단은 큰 배이고, 큰 나라인 중국마저 이러한 큰 배를 타고 오는 선교사는 입국을 허락하는 것으로 인식하였기 때문이다. 이와 함께 유교식 조상제사를 문의한 결과, 조상 제사를 금지한다는 소식도 함께 편지로 전함으로써 천주교 박해를 예감토록 하였다.
(4) 전라도 신자들의 대박청원(大舶請援) 추진 운동과 유항검
1795년 4월, 중국인 주문모 신부는 유항검의 초청으로 한양에서 전주를 방문하였다. 그런데 주문모 신부가 입국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신부를 입국시키고 숨긴 죄목으로 윤유일, 최인길, 황심 등이 처형되자, 조선교회는 박해에서 벗어나고 신앙의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길은 큰 배를 청해오는 것이 가장 지름길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런 계획은 주 신부는 물론, 유항검과 그의 동생 유관검, 유항검의 아들인 유중태, 윤지충의 동생으로 고산 저구리에서 살았던 윤지헌 등 전라도 신자들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이에 따라 1796년 황심(黃心)을 시작으로 1797년~1801년까지 여러 차례 북경에 밀사들이 파견되었다. 이런 밀사들의 실제적인 정신적, 물질적 후원자는 유항검이었다. 이들은 천주교 사상으로 사회제도를 개혁하면 이상적인 사회가 될 것으로 생각하였다. 당시 백성들의 민심은 이미 조선왕조로부터 멀어져 있었기에 이 왕조의 통치권 밖의 세력에 희망을 걸었고, 그러한 기대감을 천주교 신자들은 서양 선박에 걸고 있었다. 이러한 신자들의 근본적인 목적은 선교사 영입과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5) 전라도 천주교공동체의 발전
전라도는 1791년 신해박해 이후 10년 동안 박해가 없어서 신자들이 매우 많았으며, 고산, 완주, 무장을 축으로 하여 확산되었다. 윤지헌이 고산 저구리에 정착하면서 고산, 진산, 금산, 무안, 영광, 강진, 정산, 은진 등에 천주교가 확산되었다. 유항검은 초남이를 중심으로 자기 소유의 전답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이에 감화를 받은 많은 사람이 입교함으로써 전주, 김제, 영광 등지까지 신자들이 늘어났다. 최여겸은 무장[고창], 함평, 흥덕, 영광 등지의 28명을 입교시켰다. 전라도뿐만 아니라, 경기도와 충청도에서는 천주교에 관심을 갖고 있던 사람들이 신앙공동체가 있던 지역으로 이사를 오거나, 아니면 여러 날 신자들의 집에서 머물다 돌아가기도 하였다. 그 결과 처음 박해가 있던 1790년경에는 4천 명, 1800년 무렵에는 약 1만 명에 이르렀다. 그동안 정부의 여러 번의 탄압은 천주교를 막기보다는 오히려 천주교에 대한 백성들의 관심을 끌도록 만들었다. 1800년 당시 조선 인구는 750만 명 내외였는데, 천주교 신자수는 약 1만 명을 기록하였다.
(6) 유항검의 아들 부부인 유중철 요한과 이순이 루갈다
대박청래운동(大舶請來運動)[외국의 큰 배를 불러들여 신앙의 자유를 얻으려는 운동]이 무르익던 1797년에 유항검의 집안에서는 맏아들인 유중철과 서울 명문가인 이순이가 형식적으로는 부부이지만 실제로는 오누이처럼 사는 동정부부가 탄생하였다. 이순이는 전주이씨 경령군의 후손으로 1872년 한양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이윤하요, 어머니는 안동권씨였다. 이윤하의 7대조는 지봉(芝峯) 이수광이며, 어머니는 성호(星湖) 이익의 딸로 대대로 벼슬을 한 명문가였다. 그리고 이순이의 어머니 권씨는 대학자였던 권철신과 조선천주교회의 창설 주역 중 한 사람인 권일신의 누이동생이었다. 이순이의 집안에서는 별로 이름이 없던 유항검 집안과의 결혼에 반대가 심하였으나, 1797년 주문모 신부의 주례로 혼인을 하고는 친정에서 지내다가 1798년 이서면 초남이로 이사를 왔다. 두 사람은 부모 앞에서 동정부부로 살겠다는 서약을 하고 순교할 때까지 4년을 동거하면서 오라비와 누이로 부르며 지내다가 신유박해[1801년] 때 순교하였다.
(7) 신유박해[1801년]와 유항검
정조가 승하하고 11세의 어린 순조(純祖)가 왕위에 오르면서 대왕대비 김씨[貞純王后]가 수렴청정을 하였다. 대왕대비의 오빠는 김구주(金龜柱)로 노론 벽파의 우두머리였다. 또한 순조의 왕비인 순원왕후(純元王后)의 아버지 김조순(金祖淳)이 정권을 장악하여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를 시작하였다. 그는 정조의 정책을 충실히 따랐던 노론 시파였다. 정조의 아버지 장헌세자[사도세자]는 영조 38년(1762)에 노론 벽파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다. 장헌세자의 죽음으로 노론은 그의 죽음을 동정하던 시파(時派)와 그의 부덕함을 비난하며 공격하던 벽파(僻波)로 나뉘었다. 이들의 대립은 남인에까지 영향을 주어 천주교를 신봉하던 신서파(信西派)와 천주교를 공격하던 공서파(攻西派)로 나뉘었다. 남인 신서파는 대부분 시파에 속하였고, 진보적인 사상을 가진 인물들이었다. 김 대왕대비를 중심으로 노론 벽파가 정권을 독점하면서 진보 정치세력이자 천주교 성향인 남인 신서파의 제거가 시작되었다. 여기에 남인 벽파가 노론 벽파와 합심하여 공격하였다. 1801년 1월에 김 대왕대비는 천주교 박해령을 내려 천주교를 완전히 없애려고 하였다. 정순왕후 김씨는 천주교를 무군무부(無君無父)의 종교이자 인륜을 파괴하는 금수와 같다고 하면서 그 폐륜성을 지적하였다. 또한 오가작통법(五家作通法)을 철저히 내세워 천주교도들을 고발케 함으로써 천주교도들을 탄압하면서 정적인 남인 시파도 함께 제거할 수 있었다.
(8) 유항검의 순교와 초남이
신유박해[1801년]가 시작되면서 전라도 천주교회에도 박해가 시작되었다. 당시 전라감사는 김달순(金達淳)으로 당시 실권자이던 김조순이 추천하였다. 유항검을 검거하라는 공문이 내려오자 완주 이서면 초남이를 급습하여 유항검과 그의 동생인 유관검을 체포하고 주변 인물들까지 모두 잡아들였다. 이외에도 전라감영의 포졸들은 전주, 금구, 김제, 고산, 무장, 흥덕, 영광, 함평, 무안 등지를 수색하여 200명 이상의 신도들을 체포하여 옥에 가두고 심문을 하였다. 같은 해인 1801년 9월에 유항검, 유관검, 윤지헌 등을 비롯한 수많은 천주교도는 경각심을 주려고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처형되었다. 이들은 현재 전동성당인 전주 풍남문 앞에서 사지가 찢겨 죽임을 당하였고, 그들의 잘린 목은 풍남문 누각에 매달렸다. 현재의 전동성당 터는 이미 10년 전에 윤지충과 권상연의 처형장이었다. 이와 함께 함께 유항검 가족들은 모두 체포되어 사형을 당하였을 뿐만 아니라, 모든 재산은 몰수당하고 그의 집은 파가저택(破家瀦宅)되었다. 대역죄인의 집이기에 집터의 흔적마저 지우려고 연못을 만들어버렸다. 풍수지리적 관점에서 다시는 그 집터의 땅 기운을 받지 못하도록 물로 차단하려던 목적이었다.
초남이가 성지로 개발된 것은 1985년 전주교구 설정 50주년[1987년]을 앞두고 기념사업의 일환으로 유항검 생가터인 ‘파가저택’ 부지를 매입하면서부터다. 전주교구는 유항검의 생가터를 호남 천주교의 발상지로 인정하여 1987년 성지로 축복한 후 성역화 사업을 진행하였다. 이 생가 터는 또한 유중철과 이순이 동정 부부가 4년 동안 동정 부부 생활을 해온 곳이며, 전라도에서 최초로 운영되었던 교리당 터는 주문모 신부가 이 지역 처음으로 미사와 성사 의례를 하였던 장소이기도 하다. 신유박해 때 유항검을 비롯한 일가족 7명의 시신을 살아남은 노복과 친지들이 은밀하게 임시로 매장했던 터가 초남이 성지에서 서쪽으로 600미터 거리에 있는 밭 터인 것도 확인됐다. 1914년 4월 19일 전동성당을 건립한 보두네 신부와 신자들이 이 임시매장 터에서 유해를 거두어 전주 치명자 성지에 모셨다.
[2] 전국 최초의 한옥성당인 되재성당
(1) 종교 자유와 신앙공동체 구심점으로서의 성당 설립
종교 자유라는 새로운 사회적 환경을 맞아서 가장 먼저 선교사들이 한 것은 교우촌들의 정확한 실태 파악이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 선교사들을 중심으로 전국의 교우촌들에 대한 소재 파악과 진로를 모색하였던 시기였다. 전라도 역시 예외는 아니어서 여러 명의 선교사가 수시로 교우촌들을 방문하였으며 선교활동을 계속하기 위해 선교사들이 머무를 선교거점들이 세워지기 시작하였다. 그런데 완주[초남이]와 진산[먹방리]은 전래 초기부터 박해의 피해를 가장 먼저 봤다는 공통점을 가지면서도 교우촌이 형성될 수 없었으며 특히, 전주 인근은 성당이 세워지기 전까지 거의 신자들이 없었다. 오히려 산간벽지에 형성되었던 교우촌들이 신자수가 많아지면서 종교의 자유를 맞게 되었다. 이들 가운데 전라도를 담당하여 활동하던 신부들이 주로 거주하던 규모가 큰 교우촌들에 가장 먼저 성당이 세워졌다. 즉, 신부가 있던 교우촌들은 상대적으로 인근의 교우촌들에 비해 신자수가 많았고 경제적으로도 여유가 있었을 뿐더러 이미 성당 역할까지 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인근의 교우촌들을 담당할 수 있는 지리적 위치를 차지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그래서 ‘큰 교우촌’들은 인근의 작은 교우촌 및 새로 입교하는 신자들이 이사해서 살 정도로 종교적 흡인력도 있었다.
(2) 한옥 성당과 한옥성당촌락의 형성
이처럼 중심지로서의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던 교우촌들로는 일제강점기 이전에 세워진 다섯 군데의 본당[신부가 있는 성당을 말함]들이 이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완주의 되재성당[1895년], 진안의 어은동성당[1901년], 정읍의 신성리성당[1904년], 익산의 나바위성당[1906년], 김제의 수류성당[1907년] 등이다. 전라도 한옥성당들은 모두 산간벽지에 집중한 교우촌들을 배후로 삼고 산간분지나 평야의 대도시 근처로 진출하기 위한 교두보들이라는 선교전략적 공통점을 갖고 있다. 따라서 대도시 중심부로 직접 진출하기에는 아직 사회적인 여건상 불리하다는 자체적인 판단 아래 기존의 큰 교우촌들에 성당을 세운 경관상의 특징이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은 사회적 분위기를 투영한 경관 특성을 갖는 천주교 교우촌들을 다른 교우촌과 대비해서 ‘한옥성당촌락’이라고 할 수 있다.
(3) 최초의 한옥성당인 되재성당
전라북도 완주군 화산면의 되재성당은 당시 가장 규모가 큰 한옥성당으로 서울의 약현성당 다음으로 세워졌다는 교회사적인 의의를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성당은 한옥성당으로서는 한국 최초라는 교회건축사적인 의미도 있다. 이처럼 중요한 위상을 차지한 가장 큰 이유는 초기 박해 이후 되재성당이 있던 고산은 북쪽의 다른 도에서 전라도로 들어오는 입구 역할을 하였기 때문이다. 이 교우촌은 고산읍으로 가는 큰 도로변에서 험준한 되재[고개를 넘기가 고되다고 해서 ‘되재’라고 부름]를 넘어야 하는 은폐된 골짜기에 입지하였다. 이러한 지형적 요인이 은신처로 유리하게 작용하였기 때문에 박해를 피하던 신자들이 이곳으로 들어와 적응했다가 다시 전라도 각지로 흩어졌던 모교회(母敎會)와 같은 역할을 하였다. 그래서 당시로서는 대규모의 한옥성당이 되재에 건축되었다고 여겨진다. 또한 이 당시에 되재에 머물던 프랑스인 비에모(Vieillmot)[愚] 신부의 성당 건축에 대한 의지도 한옥성당의 건축에 작용하였다. 그는 프랑스 은행으로부터 대부받으면서까지 건축을 시작하여 한국인 신자들의 기금으로 이를 충당하였고, 주요 자재는 충청남도 논산군 은진면에 세워졌던 쌍계사라는 절을 헐어 이용하였다. 당시 되재성당의 규모는 약 6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웅장한 건축물로서 신자들에게는 자랑이었다고 한다.
(4) 선교거점으로서의 되재성당
되재의 한옥성당에는 성당만이 아니라 사제관과 종탑 및 십사처(十四處)도 함께 설치되었다. 또한 사제관의 뒷산에는 죠스(Josse)[趙]신부와 라푸르까드(Lafourcade)[羅] 신부의 유해가 나중에 이장되었다. 이로 미루어 되재성당은 당시에 전라도의 가장 핵심적인 선교거점이었다. 그만큼 다양한 천주교 경관들이 집합된 장소였다는 점 때문에 이후에 세워진 전라북도 성당들의 재현 모델로 작용하였다. 그런데 6·25전쟁 때 모두 불타버려서 1954년에 새로 건축했고, 2004년에 도지정 문화재 제199호로 지정되었다가 2009년에 원래의 한옥성당으로 재건축되었다. 오랜 박해 끝에 신앙과 선교의 자유를 얻은 천주교는 제도종교 속으로 진입하기 위한 모습을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이런 성과의 반영이 본당의 창설과 성당건축으로 나타났다. 성당건축이 본격화되면서 기존의 교우촌을 담당할 수 있는 선교거점의 장소로 전주를 제외한 5개 지역을 선정하고 있는데, 당시에 활동 가능한 신부(神父)의 수와도 관련되었다. 도시가 아닌 산골짜기 아래에 세워지는 성당은 깊은 골짜기 주변에 흩어져 있던 교우촌들의 구성원들만 대상으로 하는 경관은 아니었다. 선교거점으로서 선교활동의 중심지이자 장차 도시로 나가기 위한 전진기지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높은 산지의 골짜기보다는 소규모 산간분지를 선택하여 이동하되 아직까지 신자들이 많이 분포하고 있던 깊은 골짜기의 교우촌들과도 비교적 가까운 거리가 유지되어야만 하였다.
(5) 되재성당의 위상
박해를 통해 세력을 잃지 않았다는 자신감의 표현인 한옥성당 가운데 되재성당은 중심지로서의 위상을 갖고 있었다. 먼저 천혜의 지리적 위치를 들 수 있다. 즉, 노령산지와 소백산지가 합쳐지는 분수계의 북단이자 충청도와는 산 하나를 사이에 두고 바로 전라도와 연결된다는 점이 가장 큰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전국적인 교계제도가 아직 확립되지 않았던 당시에 두 지역을 넘나들면서 담당하였던 선교사들에게는 이런 천혜의 요충지가 매우 중요하였을 것이다. 또한 산골짜기이지만 비교적 넓은 분지가 발달해서 많은 인구를 부양할 수 있었던 경제적 요인도 작용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래서 되재성당은 선교거점 가운데서도 핵심지로 성장할 수 있었으며 수류, 나바위, 어은동, 신성리 등을 차례대로 분가시키는 모교회의 역할을 하였다. 다른 한옥성당들 역시 각기 많은 교우촌을 담당하면서 그들의 신앙을 유지하고 선포하는 핵심지로 성장하였다. 그렇지만 도시를 중심으로 선교거점을 옮기려던 선교 지도부의 움직임 때문에 이들의 쇠퇴는 예상보다 빨랐다. 즉, 일제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한 산간벽지 교우촌들의 쇠퇴와 이곳 신자들의 도시로의 이동, 그리고 도시민들의 개종이라는 선교전략의 수정 등이 작용하였기 때문이었다. 특히 산간벽지라는 지형적 불리함을 극복할 수 없었던 요인은 그 쇠퇴의 속도를 가속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6) 천주교경관의 입지 이동과 선교전략
천주교 전래 초기에는 한양과 경기도 및 전라도와 충청도를 중심으로 전파되다가, 종교박해기에는 피신하기에 좋은 산지와 구릉의 분수계 주변에 교우촌을 형성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다가 종교의 자유를 맞아 큰 규모의 교우촌들이 있던 소규모 산간분지에 한옥성당을 건축하여 선교거점으로 삼기 시작하였다. 이것은 산지의 교우촌들의 관리와 함께 도시민들의 개종이라는 두 가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과도기적인 선교전략의 결과였다. 그리고 일제강점기부터는 도시중심의 선교전략이 본격화되면서 성당들의 수적 증가와 함께 신자 수 또한 급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