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30215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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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忠臣忠毅公 嚴興道 旌閭碑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유적/비 |
지역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1090-1] |
시대 | 조선/조선 후기 |
집필자 | 정용건 |
건립 시기/일시 | 1726년 -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 청주에 건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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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전 시기/일시 | 1759년 -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 청주에서 영월로 이건 |
이전 시기/일시 | 1969년 -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 이건 |
현 소재지 |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 -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단종로 190[영흥리 1090-1] |
성격 | 비석 |
관련 인물 | 엄흥도 |
재질 | 석재 |
크기(높이, 너비, 두께) | 107㎝[높이]|22㎝[너비]|13㎝[두께] |
[정의]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장릉에 있는 엄흥도의 충절을 정표하는 사적비.
[개설]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忠臣忠毅公嚴興道旌閭碑)는 단종이 세조에 의하여 죽음을 당하자 장례를 치른 엄흥도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비석이다. 1726년(영조 2) 엄종한(嚴從漢)의 상언으로 청주에 세웠다. 그 뒤 1759년(영조 35) 어명으로 고향인 영월로 옮겼다. 1788년(정조 12) 어명으로 창절사와 배견루 및 엄충신 정문(旌門)을 중수하였다. 1792년(정조 16) 영월부사 박기정의 부탁으로 강원도관찰사 윤사국(尹師國)이 정려비문을 찬서하여 세웠다. 1833년(순조 33) 공조판서로 추증되어 비문을 가필하고 5월 개건하였다. 1876년(고종 13) ‘충의(忠毅)’라는 시호를 내리고, 1878년 교지를 받고 1879년 영월부사 박해철(朴海哲)이 비 앞면을 고쳐 새겼다. 1901년(고종 38) 정려각을 수축하고 영월군수 이인긍(李寅兢)이 정려중수기를 찬하였다.
[위치]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는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90-1번지 장릉에 있다. 영흥리 1069번지에 있었는데, 1969년 5월 장릉 경내로 옮겨 중수하고 홍살문을 세웠다. 장릉 경내 정문에서 왼편에 있다.
[형태]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는 개석[뚜껑돌]과 비신[비석의 중심을 이루는 비문을 새긴 돌], 대좌[비석을 받치는 대] 세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개석은 맞배지붕 모양이고 비신은 높이 107㎝, 너비 22㎝, 두께 13㎝이다.
[금석문]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 앞면에는 ‘조선충신 영월군호장 증자헌대부 공조판서 겸지의금부사·오위도총부도총관 시호 충의 엄흥도의 지문. 영조 병오년(1726) 특별히 정려를 명하고, 순조 계사년(1833) 정경(찬서)에 가증하였으며, 고종 13년 병자(1876) 충의라는 시호를 내렸고, 고종 16년 기모(1879)에 비면을 고쳐 새겼다.’라는 내용이 새겨져 있다. 뒷면에는 윤사국이 쓴 엄호장의 충절을 정표하는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현황]
충신충의공 엄흥도 정려비는 비각 안에 있어 관리 상태가 양호하다. 비신 글자에 빨간색 주사를 입혔고, 주사 가운데 아랫부분이 약간 바래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