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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193
한자 徐有榘
이칭/별칭 준평(準平),풍석(楓石),문간(文簡)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무 관인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영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764년 - 서유구 출생
활동 시기/일시 1790년 - 서유구 문과 급제
활동 시기/일시 1797년연표보기 - 서유구 순창 군수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05년 - 서유구 성균관 대사성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24년 - 서유구 돈녕부 도정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3년 - 서유구 전라도 관찰사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835년 - 서유구 정부 좌참찬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845년연표보기 - 서유구 사망
출생지 서유구 출생지 - 서울
수학지 서유구 수학지 - 서울
부임|활동지 서유구 부임지 - 전라북도 순창군
묘소|단소 서유구 묘소 -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금릉리
성격 문관|순창 군수
성별
본관 대구(大邱)
대표 관직 판의금부사

[정의]

조선 후기 순창 군수를 지낸 문관이자 학자.

[가계]

본관은 대구(大邱). 자는 준평(準平), 호는 풍석(楓石). 증조할아버지는 판서 서종옥(徐宗玉), 할아버지는 대제학 서명응(徐命膺), 아버지는 이조 판서 서호수(徐浩修)이다. 어머니는 한산 이씨(韓山李氏)로 이이장(李彛章)의 딸이다. 재종숙(再從叔) 서철수(徐澈修)에게 입양되었다.

[활동 사항]

서유구(徐有榘)[1764~1845]는 한양에서 출생하였고, 1790년(정조 14) 증광 문과의 병과에 급제하였다. 규장각 대교(奎章閣待敎), 예문관 검열 등을 거쳐 1794년 부교리가 되고, 1797년 순창 군수로 부임하였다. 순창 군수로 있을 때 농서(農書)를 구하는 정조의 구언(求言)이 있자 도 단위로 농학자를 한 사람씩 두어 각기 그 지방의 농업 기술을 조사·연구하여 보고하게 한 다음, 그것을 토대로 내각에서 전국적인 농서로 정리·편찬하도록 하자는 방안을 제시하였다. 1801년(순조 1) 사헌부 장령, 형조 참의 등 여러 관직을 지내고 1805년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1806년 작은아버지 서형수(徐瀅修)김달순(金達淳)의 옥사에 연루됨에 따라 벼슬에서 물러난 뒤 17년간 은거하면서 『임원 경제지(林園經濟志)』 등 여러 저술에 힘썼다.

1824년 돈녕부 도정(敦寧府都正)으로 복직되고, 이후 양주 목사, 강화 유수, 대사헌, 공조 판서 등 여러 관직을 거쳐 1833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다. 전라도 관찰사 재직 당시 때마침 흉년을 당한 이 고장 농민의 구황을 위하여 구황 식물인 고구마 보급에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도록 『종저보(種藷譜)』를 써서 보급하였다. 1835년(헌종 1) 의정부 좌참찬으로 옮긴 뒤 병조 판서, 수원 부유수, 대사헌, 판의금부사 등을 지낸 뒤 1839년 임금에게 물러날 것을 청하여 허락을 받았다. 1842년에는 여생을 마무리하는 자찬 묘지명(自撰墓誌銘)인 「오비 거사 생광 자표(五費居士生壙自表)」를 지었고, 1845년(헌종 11)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이용후생(利用厚生)’을 중시하였던 가학(家學)의 영향을 받아, 실학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성리학을 비판적으로 계승하려 하였다. 당시 조선에서 숭상되던 정주계(程朱系)의 송학과 중국에서 유행하던 한학(漢學)을 절충, 표준으로 삼을 만한 경설(經說)을 고정(考定)하려는 염원을 가졌다. 경제 사상(經濟思想)은 할아버지 서명응을 비롯한 실학파 여러 학자들의 영향을 받았는데, 이용후생을 주로 하면서 경세치용(經世致用)까지 종합하려 하였다. 경제 사상에 지대한 관심을 가지게 된 데는 일찍이 여러 해 동안 지방의 목민관으로 재직하면서 비참한 서민 생활과 농정(農政) 전반을 실제로 목격하고 경험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여러 방면에 두루 능통하였으면서도 각별히 농정 방면에 힘썼던 것은 이 때문이다.

저술로는 주저인 『임원 경제지』를 비롯하여 『금화지비집(金華知非集)』 12권, 『풍석 고협집(楓石鼓篋集)』 6권, 『누판고(鏤板考)』 7권, 『한양 세시기(漢陽歲時記)』 1권 등이 있다. 25세 때 문집 『풍석 고협집』을 편찬할 정도로 문학적 기량이 뛰어났다. 실학자·박물학자로서의 학문적 업적을 대표할 만한 저술은 1835년 무렵에 나온 『임원 경제지』다. 모두 113권 52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내용은 책 이름이 나타내는 바와 같이 16개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그 목록을 보면 본리지(本利志)·관휴지(灌畦志)·예원지(藝畹志)·만학지(晩學志)·전공지(展功志)·위선지(魏鮮志)·전어지(佃漁志)·정조지(鼎俎志)·섬용지(贍用志)·보양지(葆養志)·인제지(仁濟志)·향례지(鄕禮志)·유예지(遊藝志)·이운지(怡雲志)·상택지(相宅志)·예규지(倪圭志) 등이다. 전원생활을 하는 선비들에게 필요한 지식과 기술, 기예와 취미 등을 담은 백과전서이자 생활 과학서의 성격을 지닌다.

[묘소]

경기도 파주시 진서면 금릉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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