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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시대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547
한자 朝鮮時代
분야 역사/전통 시대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일반)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범호

[정의]

조선 시대 전라북도 순창군의 역사와 문화.

[행정 편제]

1. 조선 전기

1409년(태종 9) 전라도의 모든 임내를 직촌화하는 조치에 따라 순창군의 임내인 적성현복흥현 및 치등소, 유등촌소, 감물토소, 잉좌소, 고도암소 등이 순창군의 직촌으로 병합되었다. 신라 때부터 현이었고, 고려 시대에는 남원부나 순창군의 임내였지만 하나의 고을이던 적성현복흥현 등이 없어지고 5개의 소까지 합해져서 적어도 8개의 고을이 순창군으로 통합되었다. 순창군은 18방(坊)을 관할하였으며, 이때부터 대체로 현재와 같은 행정 구역을 유지해 왔다. 1466년(세조 12) 행정 조치에 따라 전국의 모든 군들과 함께 수령이 지군사(知郡事)에서 군수(郡守)로 바뀌었는데, 이는 대체적으로 조선 후기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당시 전라도의 행정 구획을 통해서 순창의 위상을 살펴보면, 전주는 종2품의 부윤(府尹), 나주와 제주 두 곳에 정3품의 목사(牧使)가 배치되다가 성종 때 광주(光州)가 추가되어 3곳이 되었고, 남원을 비롯한 종3품의 도호부사가 4곳이었으며, 순창을 비롯한 종4품의 군수가 12곳, 금구를 비롯한 종5품의 현령이 6곳, 태인을 비롯한 종6품의 현감이 파견된 고을이 31곳이었다. 이를 통해 조선 시대 전라도에서 순창의 위상은 종4품의 현령이 다스리는 상당한 위치에 속하는 고을임을 알 수 있다.

순창군은 조선 초 계수관제에서는 전라도의 4계수관[전주·남원·나주·장흥] 중 남원 계수관 관할이었고, 1466년 이후의 진관제(鎭管制)에서도 남원 진관에 속하였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후에 진관제와 별도로 신설된 진영제(鎭營制)에서는 전라도 5영(營)인 중영(中營)[전주], 전영(前營)[순천], 좌영(左營)[남원. 뒤에 운봉으로 교체], 우영(右營)[나주], 후영(後營)[여산] 가운데 좌영에 속하였다.

2. 조선 후기

조선 후기 순창의 면리제(面里制)에 대하여 살펴보면, 조선 전기에는 대체적으로 동서남북의 방위를 주로 하여 방위면 체제로 되어 있었는데 임진왜란을 전후한 시기부터 형태가 세분화되거나 지역 명칭이 붙은 새로운 면이 나타났고, 면과 함께 촌(村)·방(坊)·사(社)·리(里)·부(部) 등도 혼용되었다. 『여지도서(輿地圖書)』[1670], 『호구 총수(戶口總數)』[1789], 『대동지지(大東地志)』[1864] 등을 보면 순창군의 면(面) 또는 방리(坊里)가 18면으로 되어 있다. 다만 면의 명칭에 차이가 나타나는데, 『대동지지』에는 그 이전의 목과동면(木果洞面)이 목과면(木瓜面), 이암면(耳巖面)이 구암면(龜巖面), 잉화벌면(仍火伐面)이 인화면(仁化面), 아동곡면(阿東[洞]谷面)이 하동면(河東面)으로 되어 있고 『호구 총수』의 자산면(者山面)은 다른 책에는 오산면(鰲山面)으로 표기되어 있다.

[성씨와 인구]

조선 왕조가 들어선 이후 역대 왕의 최대 관심사는 인적 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호구를 어떻게 파악하느냐는 것이었다. 순창 지역의 성씨에 대하여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의 성씨조에 본군은 설(薛)·염(廉)·임(林)·조(趙)·호(扈) 혹은 옹(邕)·김(金), 복흥은 임(林)·조(趙), 적성은 송(宋)·이(李)·정(程)·황(黃)·현(玄), 유등은 정(程)·이(李)·송(宋), 감물도는 최(崔), 치등은 이(李)·정(井)·임(林)·백(白)·경(景)·김(金) 등 모두 24성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 순창을 본관으로 쓰는 성씨는 설(薛)·조(趙)·옹(邕) 3개 성 외에는 찾아볼 수 없다. 그중 조씨는 본군조에 조씨와 복흥조에 있는 조씨가 있는데, 본군의 조씨는 옥천(玉川)으로 복흥의 조씨는 순창으로 본관을 쓰고 있다.

순창의 인구는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에 의하면 조선 초 호수는 317호, 인구는 1,092명이었다. 『호구 총수』에 의하면 조선 후기에는 18개 면, 234개 리, 6,836호에 남자 1만 1746명, 여자 1만 5103명으로 총 2만 6849명이었다.

각 면의 통계를 살펴보면 좌부면은 9개 리에 원호(元戶) 746호이고, 인구는 남자 1,499명, 여자 1,714명으로 총 3,213명이었다. 호계리는 14개 리에 원호 348호이고, 인구는 남자 660명, 여자 718명으로 총 1,378명이다. 잉화벌면은 6개 리에 원호 173호이고, 인구는 남자 266명, 여자 371명으로 총 637명이었다.

적성면은 14개 리에 원호 373호이고, 인구는 남자 682명, 여자 802명으로 총 1,484명이었다. 아동곡면은 7개 리에 원호 324호이고, 인구는 남자 462명, 여자 646명으로 총 1,108명이었다. 유등면은 12리에 원호 391호이고, 인구는 남자 635명, 여자 793명으로 총 1,428명이었다. 자산면은 7개 리에 원호 250호이고, 인구는 남자 522명, 여자 543명으로 총 1,065명이었다. 석부면은 13개 리에 원호 346호이고, 인구는 남자 548명, 여자 847명으로 총 1,395명이었다.

품곡면은 12개 리에 원호 346호이고, 인구는 남자 635명, 여자 795명으로 총 1,430명이었다. 금동리는 12개 리에 원호 318호이고, 인구는 남자 453명, 여자 771명으로 총 1,224명이었다. 목과동면은 8개 리에 원호 276호이고, 인구는 남자 472명, 여자 536명으로 총 1,008명이었다. 덕진면은 13개 리에 원호 261호이고, 인구는 남자 473명, 여자 577명으로 총 1,050명이었다. 팔등면은 8개 리에 원호 315호이고, 인구는 남자 533명, 여자 694명으로 총 1,227명이었다.

이암면은 18개 리에 원호 412호이고, 인구는 남자 623명, 여자 871명으로 총 1,494명이었다. 무림면은 18개 리에 원호 447호이고, 인구는 남자 681명, 여자 979명으로 총 1,660명이었다. 하치등면은 22개 리에 원호 566호이고, 인구는 남자 1,143명, 여자 1,227명으로 총 2,370명이었다. 상치등면은 20개 리에 원호 398호이고, 인구는 남자 672명, 여자 958명으로 총 1,630명이었다. 복흥면은 21개 리에 원호 546호이고, 인구는 남자 787명, 여자 1,260명으로 총 2,047명이었다.

『호구 총수』에 기록된 당시 순창 군세는 면 평균 리 수 13, 면 평균 호수 380, 리 평균 호수 29호로 당시 전라도 56개 군현과 비교하면 면 수 2.2%, 리 수 1.9%, 원호 수 2.1%, 남자 인구 2%, 여자 인구 2.3%를 차지한다.

[교통·통신]

조선 시대 역(驛)은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에 효율적으로 미치게 하는 시설로 중요한 의미를 지녔다. 교통·통신 수단으로 공무 연락, 군사 통신, 조세 운반의 기능을 발휘하던 역은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는 주요 도로에 설치되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나타난 전라도에 설치된 역으로 창활도(昌活道), 앵곡도(鶯谷道), 제원도(濟原道), 벽사도(碧沙道), 삼례도(參禮道), 청암도(靑巖道), 경양도(景陽道) 등 7개의 주역(主驛)과 50개의 소속 역이 있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에는 삼례도, 오수도(獒樹驛), 청암도, 경양도, 벽사도, 제원도의 6개 주역과 53개의 소속 역이 나타난다.

순창의 역원을 살펴보면 역으로 창신역(昌新驛)[순창군 유등면 창신리 창신]은 전라도 6개 역도(驛道) 가운데 경양도[광주]에 속하였고 역리(驛吏)는 31명, 노(奴)[남자 종] 7명, 비(婢)[여자 종] 4명, 말 7필을 보유하였다. 원(院)은 동원, 서원[순창군 순창읍]과 적성원[순창군 적성면 고원리 원촌], 우현원(牛峴院)[순창군 풍산면 금곡리 우치], 마월원(磨月院)[순창군 금과면], 노현원(蘆峴院)[순창군 인계면 탑리 노령]이 있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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