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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선문첩으로 조선 시대 순창 여인들의 서화 세계를 보다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006
한자 勸善文帖-朝鮮時代淳昌女人-書畵世界-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이철량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특기 사항 시기/일시 1482년 - 『설씨 부인 권선문』 제작

[작품이 남아 있는 최초의 여성 화가]

조선 시대 여인들의 생활은 일반적으로 정숙하고 도덕적이며 남편에 대한 내조를 강조해 왔던 삶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사회적 풍조는 특히 양반 계층의 여성에게 더욱 요구되었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당시의 여성들의 삶의 덕목으로서 가치를 가지고 있었다. 따라서 양반 계층의 여성들은 사회 활동이 지극히 자제되어 왔으며 그들만의 어떤 내밀한 생활 환경을 가지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따라서 여성들의 사회 참여는 당연히 제한적이었으며 또한 활동 공간도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이 시대 여성들이 모두 가사에만 한정하여 가정 안에서만의 존재로 머물렀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 좋은 예로서 『설씨 부인 권선문(薛氏婦人勸善文)』[보물 제728호]을 남긴 순창의 설씨 부인[1429~1508]을 들 수 있다.

조선 시대 여성들의 사회 활동이 지극히 제한적이고 은밀하게 이루어졌으나 그들의 활동은 사회 여러 곳에서 큰 영향을 주고 있기도 하다. 특히 조선 여인들의 서화 활동에서도 그러한 면모를 엿볼 수 있다. 조선 초기의 대표적 선비 화가였던 강희안(姜希顔)[1417~1464]은 “선비가 그림을 후세에 남기는 것은 이름을 욕되게 한다.”라고 했던 말에서 이해될 수 있는 것처럼 당시 서화에 대한 양반 계층의 이해를 보면 특히 여성들이 서화를 즐긴다는 것을 쉽게 상상하기 어렵다. 조선 시대 여성 화가들의 이름이 남아 있지 않은 저간의 이유를 알 만하다. 그래서 설씨 부인이 남긴 권선문첩(勸善文帖)은 역사적으로 매우 귀중한 의미를 가진 자료일 수밖에 없다. 이 권선문첩은 설씨 부인이 기록으로 남은 역사상 가장 연대가 올라가는 여성 서화가로 지목되며 한편 이미 널리 알려져 있는 신사임당(申師任堂)[1504~1551] 보다도 70여 년이나 앞서 있는 인물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이러한 권선문첩을 통해 당대 순창 여인들의 서화 세계를 들여다 볼 수 있다.

[설씨 부인은 누구인가]

설씨 부인에 대해서는 조선 시대 여인들 거의 대부분이 그렇듯이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그를 비롯한 많은 전통 시대 여성들의 삶에 대한 연구 측면에서 매우 아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설씨 부인은 설백민(薛佰民)의 딸로 순창에서 태어났으며, 문장과 서화에 능하였다. 그 외의 행적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확인할 방법이 없지만 남편이었던 귀래정 신말주(申末舟)[1429~1503]의 행적을 통해 그녀의 삶의 일면을 상상해 볼 수 있다.

귀래정 신말주는 1429년(세종 11)에 태어나 1454년(단종 2)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섰다. 1455년에 단종이 폐위되고 세조가 즉위하자 병을 핑계 삼아 부인의 고향인 순창 남산대에서 은거하였다. 1459년(세조 5)에 다시 대사헌 및 형조 참의가 되었으나 1467년(세조 13)에 낙향하였다. 1476년(성종 7)에 전주 부윤으로 1년간 봉직하다 낙향하였으나 10년 후 창원 도호부사 그리고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와 대사간을 거쳐 전라도 수군절도사를 끝으로 순창에 머물다 생을 마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신말주가 이처럼 단종, 세조, 성종 등을 거치며 낙향과 벼슬을 번갈아 했던 것은 그가 얼마나 강직하고 청렴한 인물이었는지를 알게 한다. 그런데 신말주가 줄곧 벼슬에 있다 병을 핑계 삼아 부인의 고향인 순창으로 되돌아오기를 반복한 것을 보면 아마도 설씨 부인의 친정이 매우 유족하고 안정된 환경이었으며, 한편으로 부인 설씨에 대한 남다른 애정이 있었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순창이 산수가 수려하고 인정이 깊어 선비가 머물기에 부족함이 없었던 데도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남편의 벼슬길 때문에 설씨 부인도 한양, 전주, 경상도 등으로 거처를 옮겨가며 생활하였을 것으로 짐작되나 한편으로는 워낙 신말주의 성품이 세속을 멀리하고 또한 자주 낙향했던 것으로 보아 고향 순창에서 지냈던 세월이 많았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설씨 부인 역시 대대로 순창 명문 가문의 여식이었으며 한편으로 덕망이 높은 여성으로서 주변의 많은 사람들에게서 신망을 받았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는 설씨 부인이 부도암(浮圖庵)[강천사의 전신]의 승려 약비(若非)의 요청을 받고 곧바로 권선문을 지어 주변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고 부도암 개축에 협조하도록 요청한 것에서도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남편 신말주 또한 순창 인근에 살던 여러 선비들과 정기적으로 교유하며 시문을 나누었음을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申末舟先生의十老契帖)』[전라북도 유형 문화재 제142호]에서 알 수 있다. 『신말주 선생의 십로계첩』은 그의 나이 70세에 썼으며 열 명의 노인들이 모여 모임을 함께 하며 감상하였다 한다. 이러한 저간의 활동으로 보아 부부가 풍류를 즐기고 학문에 밝아 당대 많은 인물들과 교유하며 존경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권선문첩의 제작 동기]

하루는 설씨 부인에게 승려 약비라는 사람이 찾아와 말하였다. 순창군 내 인근 광덕산 중에 작은 사찰이 하나 있는데 이 절을 부도암이라 한다. 그리고 이 부도암에 승려로서 중조라는 스님이 부도암을 개축하고자 하니 부인의 시주를 원하노라 하였다. 이 말을 듣고 설씨 부인은 “참으로 좋은 일이나 본인이 직접 나서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기 어려우니 내가 이러한 내용을 직접 써서 여러 사람들에게 알리겠노라.”라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설씨 부인은 곧바로 부도암 개축에 대한 여러 자세한 내용을 서술하고 시주를 원한다는 글과 함께 부도암의 모습을 그린 권선문을 만들었다. 이러한 저간의 내용들이 권선문첩에 자세히 기록되었으며 또한 산수화 형식을 빌린 부도암의 정경이 함께 담겨 있어 설씨 부인의 활동과 당시 여성들의 사회적 그리고 예술적 활동에 대해서도 엿볼 수 있게 한다.

[광덕산 부도암도]

설씨 부인이 쓰고 그렸다는 것이 확실한 권선문첩에는 글과 함께 부도암도(浮圖庵圖)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광덕산에 있는 부도암의 모습을 여러 사람에게 알려 주기 위해 부도암 개축에 관한 글을 쓰고 그려 넣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광덕산을 부감법으로 조망하고 그림 중앙에 부도암이 들어 있다. 그림 하단을 전경으로 삼아 큰 소나무와 떡갈나무를 배치하고 산세의 흐름을 오른편으로 몰아 상단 왼편으로 시선이 옮겨 가게 구성되어 있다. 광덕산이 화면 전체적으로 꽉 찬 모습이며 부도암으로 시선이 집중되도록 중앙에 널찍한 공간을 설정하고 건물 세 채를 가진 부도암을 그려 넣었다.

화면 구성이 매우 탄탄하고 근대적인 시각을 보여 주고 있어 조선 초기의 작품으로서는 매우 이례적인 모습이라 할 수 있다. 재미있는 것은 화면의 전체적인 시선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바라보는 모습인데 반해 맞배지붕을 한 부도암 건물은 왼편에서 오른편으로 바라보는 형태를 하고 있다는 점이다. 암자의 주 건물은 2칸이며 오른편에 지어진 부속 건물은 한 칸인데 약간 높은 축대를 쌓아 지은 건물이다. 그리고 앞 왼편으로 일주문으로 보이는 작은 건물이 있다. 부도암이 매우 작은 암자였음을 보여준다. 설씨 부인이 부도암의 구조와 위치를 정확히 알고 있었으며, 평소 이러한 불사에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부도암도에서 관심을 끄는 것은 광덕산의 묘상에 있다. 화면 상단 중앙에 주봉을 세우고 좌우 대칭으로 묘사한 산의 묘법이 매우 한국적 특색을 보여 주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 초기 산수화의 대가였던 안견(安堅)의 화풍에서 나타났던 단선점준(短線點皴)과 산 능선에 수직으로 서 있는 나무 묘사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뿐만 아니라 측필(側筆)을 사용하여 단순하게 처리한 후경의 소나무 숲, 그리고 전경의 소나무 잎을 그린 해조묘법(蟹爪描法)에서도 그녀가 얼마나 당대 화풍을 깊이 있게 소화했는지를 보여 준다.

[권선문첩의 의미]

권선문첩은 오랫동안 학계에 알려져 있지 않은 보물이었다. 특히 권선문첩에 담겨있는 설씨 부인의 부도암도는 그 기법이나 회화사적 의미로서의 연구가 전혀 이루어지지 못한 채 잠자고 있었다. 권선문첩은 지난 2000년 순창 문화유산을 조사하면서 본격적으로 학계에 등장하게 되었고, 이 그림이 조선 시대에 남아 있는 최초의 여성 화가의 작품으로서 주목받게 되었으나 이후 연구가 더 이상 확대되지 못하고 있었다. 따라서 부도암도에 대한 본격적인 연구는 앞으로 지속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된다. 권선문첩은 우리에게 많은 시사점을 보여주고 있다. 첫째로 이는 당시로서는 매우 이례적으로 순창이라는 작은 지방에서 활동했던 한 여성이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는 점이며, 둘째로 우리 역사에서 이만한 학식과 서화를 익힌 여성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조선 초기 유학이 크게 확산될 당시 여성의 활동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 중요한 가치가 있다. 셋째 주로 고향 순창에서 살았을 것으로 보이는 설씨 부인이 중국 화풍이 일반화되어 있던 당대에 새로운 화풍이었던 한국적 화풍을 어떻게 익혔는지 하는 것이다.

권선문첩은 설씨 부인이라는 한 여성의 활동을 보여 주는 자료로서뿐 아니라 조선 시대 여성들, 특히 양반 계층의 명문가 여성들이 폭넓게 학문을 익히고 서화를 다루었음을 보여 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다만 그 자료가 다양하게 남아 있지 않은 아쉬움이 크다.

[권선문첩과 순창 여인들의 서화 활동]

설씨 부인이 남긴 권선문첩은 앞서 언급된 대로 여러 면에서 조선 시대 여성들의 서화 활동과 함께 여성들의 사회 참여를 엿볼 수 있게 한다. 특히 설씨 부인의 활동으로 작은 고을이었을 순창 여성들의 삶의 모습을 짐작케 하는 부분이 크다. 설씨 부인은 권선문첩을 제작하고, 부도암의 시주를 독려하기 위해 여러 사람들이 돌려 볼 수 있도록 하였다. 이때 이 권선문첩을 통해 시주를 독려할 대상은 아마도 평소 설씨 부인과 교분이 깊었던 여성들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당시 많은 여성들이 사회적 교류를 통해 함께 서화를 즐기고 감상하였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덕망이 높았던 설씨 부인을 통해 많은 여성들이 글과 그림을 익혔을 가능성도 충분히 짐작할 만하다. 이러한 여성들의 사회 활동은 아마도 일찍부터 내려온 풍속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조선 시대를 통하여 꾸준히 이어졌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자세한 정황을 엿볼 수 있는 자료나 서화가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아 연구의 한계가 있는 점은 매우 아쉬운 대목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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