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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421
한자 九曲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곡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무림면 구곡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5년 - 전라북도 순창군 무림면 구곡리에서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곡리로 개편
법정리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구곡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2.70㎢
가구수 66가구
인구[남/여] 100명[남 47명/여 53명]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 속하는 법정리.

[개설]

구곡리(九曲里)는 예부터 효자가 많이 난 유서 깊은 마을이다.

[명칭 유래]

‘구곡’은 중국의 무이산 밑에 있는 구곡, 곧 별천지란 뜻인데, 구곡리의 지형과 무이산의 구곡이 닮은 데가 많아서 붙였다고 한다. 주희(朱熹)의 ‘무이 구곡(武夷九曲)’에 나온 무이산은 주희가 은거하며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양성하였다고 전해지는 무이 정사가 있던 곳으로, 예부터 조선 시대 선비들은 여기서 서원의 모범을 찾았으며, 옛 선비들이 가장 가고 싶어 했던 곳이라서 마을 사람들의 염원이 담겨 있다고 봐야 할 듯하다.

1760년(영조 36)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에 무림방의 소재지가 중리 마을로 기록되어 있을 뿐 아니라, 구곡리의 주산인 무이산무림산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후 여러 과정을 거쳐 무이산으로 변천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전해 오는 말로는 산 정상에 배를 매는 쇠고리가 있었다고 한다.

[형성 및 변천]

구곡리는 조선 후기 순창군 무림방(茂林坊) 지역으로, 방의 소재지가 중리 마을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옥천 군지』 방리(坊里) 신증(新增) 편에 당시 구림면으로 통합되기 전의 행정 구역을 소개하고 있는데, 군(郡)의 서북방 8㎞[20리] 지점에 무림방이 있었다고 쓰여 있다. 1897년(고종 34) 방(坊)을 면(面)으로 개칭하면서 무림방을 무림면(茂林面)으로 바꾸었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중리(中里), 동정자(東亭子), 어은동(魚隱洞)을 병합하여 구곡리라 하였다. 1935년 무림면구암면을 병합할 때 구림면 구곡리로 개편되어 현재에 이른다.

[자연 환경]

구곡리는 면소재지로부터 남쪽으로 약 3㎞ 지점에 위치한 마을로 무이산에서 동북쪽으로 뻗어 내린 산맥이 서북쪽으로 잔잔히 운구선(雲九線) 도로까지 이어진다. 구림면팔덕면의 경계 지점인 동정자재에서 동북쪽으로 둔터우 마을을 지나 연산리 앞 구림천까지 뻗어 가고, 그 사이 협곡을 이루고 있는 마지막 안쪽에 형성된 마을이 어은동이다.

남쪽으로는 무이산 자락이며, 서쪽으로는 도투마리재랑 후덕골을 지나며 중리 마을을 감싸고, 북쪽으로는 화암리와 인접해 있다. 동쪽은 구암리 둔터우와 함께 한다. 북서쪽으로 넓고 비옥한 들이 형성되어 있다. 꼴바우산은 중리 북쪽에 있는 산이며 후덕골, 박골, 둔터골, 삼박골 등의 골짝이 형성되어 크고 작은 들을 형성하고 있다. 올애기천과 투만천, 후덕천 등이 구곡리를 지난다. 무이제와 구곡제라는 저수지가 있다. 웃당내는 무이산에서 발원하는 물이 중리를 거쳐 구림천으로 흐르는 시냇물을 말한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구곡리의 면적은 2.70㎢이며, 인구는 66가구, 100명으로 남자가 47명, 여자가 53명이다. 벼농사와 복분자, 한우 농사 등을 짓고 있다. 군도 11호선과 면도 105호선이 마을을 지나간다. 옛 무림방의 소재지가 중리 마을이었다는 기록으로 보아 방을 관할하는 건물이 있었고, 그 후에는 면청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토착 성씨로 김녕 김씨(金寧金氏), 전주 이씨(全州李氏), 광산 김씨(光山金氏), 남평 문씨(南平文氏) 등이 있다. 조선 시대에는 순창아목의 시목[땔나무]을 중리 마을과 상리 마을에서 모두 댈 만큼 소나무들이 울창하게 들어서 있었다. 현 중리 마을 가운데 고령 신씨(高靈申氏)의 묘 바로 밑에 옛날에 아주 유명했다는 해수통[아픈 병을 고치기 위해 찜질과 목욕을 했던 곳]이 있었다고 한다.

구림으로 가는 길목 오른쪽에 서 있는 삼효자 정려각(三孝子旌閭閣)은 3대에 걸쳐 4명의 효자, 즉 김영만, 김채옥, 김광옥, 김종엽 등 김녕 김씨 4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810년(순조 10)경 세웠다. 또한 중리 마을 한가운데에 있는 석정문(石旌門)은 광산 김씨 세 명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만든 것으로, 후손들이 운영하고 있다.

당산제 및 마을 지킴이로는 동정자 마을 앞 삼거리 봉래정 옆에 위치한 구곡리 동정자 돌탑이 있다. 이는 단순한 선돌이 아니라 돌탑 가운데에 세워진 탑심이라는 것이다. 대체로 돌탑에는 상부에 자그마한 입석이 1~2기씩 세워지는데, 동정자 마을의 탑심은 예상 외로 크다. 돌 탑 위 입석은 크기가 높이 120㎝, 두께 27㎝, 폭 27㎝의 방형이다. 동정자 마을 앞 수구막이 정자나무는 연화부지 형상이라서 솟대와 탑을 함께 만들었다. 마을 뒤에 있는 당산에서 당산제를 지내는데, 아주 영험해서 주로 아기 못 낳는 여인네들이 정성스레 제를 지냈다고 한다. 하지만 현재는 지내지 않는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13 현행화 [상세정보] 가구수, 인구 변경, [현황] 인구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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