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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422
한자 花岩里
분야 지리/인문 지리
유형 지명/행정 지명과 마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화암리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호숙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개설 시기/일시 1914년 - 전라북도 순창군 무림면 화암리 개설
변천 시기/일시 1935년 - 전라북도 순창군 무림면 화암리에서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화암리로 개편
법정리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 화암리 지도보기
성격 법정리
면적 5.17㎢
가구수 96가구
인구[남/여] 170명[남 82명/여 88명]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구림면에 속하는 법정리.

[명칭 유래]

화암리(花岩里)의 순 한글 이름은 꽃바우로, 이를 한자로 화암이라 표기하였다. 마을 뒷산 형상이 꽃을 찾은 벌과 나비 모양을 하고 있기에 꽃바우라 하였는데, 이 바위 형상은 사자 모양으로 양쪽에서 보아도 똑같은 맹호 형상으로 양호밧등이라고 불린다.

[형성 및 변천]

1760년(영조 36) 발간된 『옥천 군지(玉川郡誌)』 방리(坊里) 신증(新增) 편에 무림방(茂林坊)에 속해 있는 화암, 안동, 중바우로 기술되었다. 1897년(고종 34) 방(坊)을 면(面)으로 개칭하면서 무림방을 무림면(茂林面)으로 고쳐 불렀다. 1914년 행정 구역 개편 때 화암 마을, 안동 마을, 중바우 마을을 통합하여 화암리로 부르게 되었다. 1935년 무림면구암면을 병합할 때 구림면 화암리로 개편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자연 마을로 화암 마을, 안동 마을, 중바우 마을이 있다.

[자연 환경]

화암리는 면 소재지로부터 서쪽으로 1.8㎞ 지점에 위치한다. 북쪽으로 운남리와 인접하고 서쪽으로 굴등이 있으며 월정리와 인접한다. 이곳 중바우 마을에 음식 상가들이 밀집해 있다. 여시골이 있는 남쪽을 지나면서 자양리와 이웃하며, 동쪽으로는 다시 운남리와 인접해 있다. 여분산(如粉山)[774m]에서 동남쪽으로 큰 산줄기가 뻗어 내리며 구림면 운북리운항(雲項) 마을을 지나면서 남쪽으로 부드럽게 변화하다가 해발 470m 고지에서 다시 동남쪽으로 솟아오르니, 이 산이 양호밧등[523m]이다. 마을 사람들은 꽃발산이라고 부른다. 이 봉우리에서 한 기운은 서남쪽으로 뻗어 월정 초등학교에 이르고, 한 맥은 동남쪽으로 안동 마을을 지나 남정리 새터에 이른다.

삼밧산은 화암리 북쪽에 있는 산이고, 마을 남쪽에 있는 산은 꽃발산이다. 남쪽에 있는 작은 산은 똥매산이라 부른다. 이 외에도 삼박산 등이 있으며 각골, 사례들, 흥건네골, 큰골 등의 자연 지명이 잘 살아 있는 수많은 골짜기가 있다. 구림면 운항리에 솟아 있는 여분산에서 흘러내린 물들과 상리 온자실에서 발원된 물들이 화암리 앞에서 치천으로 흐르며 안동천, 방아들천, 온자실천 등의 소하천을 형성하고 있다. 화암리 동쪽 안동 저수지를 막기 전에는 골짜기로 물이 흐르고 양쪽으로 느티나무 숲이 우거져 장관을 이루었다고 하며, 이곳을 숲정이라 불렀다고 전해진다.

[현황]

2021년 12월 현재 화암리의 면적은 5.17㎢로, 이 중 논 1.27㎢, 밭 18만 205㎡이다. 인구는 96가구, 170명으로 남자가 82명, 여자가 88명이다. 농경지가 많은데 주로 오색미를 생산하며, 블루베리 및 알밤 등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다. 화암리 토착 성씨는 진주 강씨(晉州姜氏), 밀양 박씨(密陽朴氏), 충주 지씨(忠州池氏) 등이다. 국도 21호선이 마을을 지나며, 지방도 792호선군도 11호선, 이도 209호선, 농도 302호선· 312호선· 314호선· 315호선 등이 있다.

화암리에서는 위쪽 당산나무를 할아버지 당산, 아래쪽 당산 나무를 할머니 당산이라 부르며 매년 정월 14일 저녁 9시경 주민 모두가 모여 당산제를 지낸다. 당산나무 바로 옆에 각각 모정이 있어 한여름 마을 사람들의 휴식처로 이용된다. 샘에 빠진 호랑이 이야기가 전하며, 서당이 세 군데나 있었을 만큼 학구열이 높았다고 한다.

화암리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이 일본군과 진위대에 의해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1905년(고종 42) 을사조약이 강제로 체결되어 외교권을 일제에 빼앗기자 전 낙안 군수 임병찬(林炳瓚)은 1906년 4월 최익현을 의병장으로 추대하고 의병 운동을 일으켰는데, 한때 그 수가 1,000여 명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최익현 의병은 그 세력이 전라도 전역에 미쳤으며, 일본군에게 커다란 피해를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최익현은 정부의 진위대가 자신들을 공격하자 동족과는 싸울 수 없다는 말을 남기고 스스로 체포되었다. 그 후 쓰시마 섬에 끌려갔다가 단식 투쟁으로 순절하였다. 마을 앞에 ‘최익현 피체지’라는 팻말이 세워져 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22.10.13 현행화 [상세정보] 가구수, 인구 변경, [현황] 인구 변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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