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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창 형평 운동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609
한자 淳昌衡平運動
분야 역사/근현대
유형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일제 강점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발생|시작 시기/일시 1923년 9월 18일연표보기 - 형평사 순창 분사 창립
전개 시기/일시 1926년 10월 18일 - 순창 형평 부흥 총회 개최
전개 시기/일시 1926년 10월 18일연표보기 - 형평사 순창 분사 청년회 창립
종결 시기/일시 1928년 4월 26일 - 형평 청년 총연맹 해체
성격 사회 운동
관련 인물/단체 형평사|형평 청년 총연맹

[정의]

1923년 전라북도 순창군에서 백정의 사회적 대우를 요구하며 일어난 운동.

[역사적 배경]

조선에서 백정은 무적자(無籍者)로서 백성의 자격이 없었다. 이들은 일제 강점기를 맞이하여 경제적인 부를 가지게 되자, 이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분 해방을 꾀하게 되고, 이런 움직임들이 형평 운동을 발생시켰다.

[경과]

1923년 9월 18일 형평사(衡平社) 순창 분사가 임시 의장 김치권(金致權)의 사회로 열렸다. 전 지사장 권두호(權斗皓)의 개회사 후 신인명(申仁明)이 형평 운동에 대한 취지를 설명했다. 이때 모였던 분사원 50여 명은 머리를 자르는 행동을 하면서 결연한 의지를 보였다. 그 후 유야무야 활동이 없다가 1926년 들어 김치권의 사택에서 10여 명이 모여 음력 1월 8일 임시 총회를 가지기로 결정하였다. 이후 1926년 10월 18일 천도교구 실내에서 순창 형평 부흥 총회를 개최하여 손각(孫角)이 개회사를 하였고 최규홍(崔圭弘)이 임시 의장으로 뽑혔다. 이때 순창 청년회 대표 신진우(申鎭雨)와 노동조합 대표 이태환(李泰煥), 내빈 선영렬(宣永烈) 등이 참여하는 등 많은 관심을 받았으며, 사복형사 2명도 입회하였다.

일반적으로 형평사는 ‘각 지방 대표와 발기인이 의연’하거나 ‘각자의 생활 정도에 따라 의무금을 납부’하는 형태였으나, 순창 지사의 경우 수육 판매업자인 사원은 사비 연 1원 이외에도 본사 유지비로 소[牛] 1두에 대하여 1원을 본사에 납부하기로 결정되었다. 또한 각지의 형평사는 자매 단체의 성격을 가진 형평 청년 단체들을 따로 조직하곤 하였는데, 순창도 1926년 10월 18일 청년회를 창립하였다.

백정의 전통적인 도축 관련 산업 가운데 이윤이 가장 많은 피혁 산업은 형평사의 주요 관심 대상이기도 했다. 일부 분사에서는 관청이나 일본인 친목 단체 또는 부유한 개인에게 넘어간 건피장[피혁 건조장]의 소유권을 되찾으려고 노력하기도 했는데, 순창에서도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결과]

1928년 4월 26일 형평 청년 총연맹은 형평 운동이 청년 운동에 지장이 된다 하여 정식으로 해체를 선언하였다. 또한 일제 당국은 1929년 10월 형평 지부장 대회를 금지시켰다. 이러한 이유로 순창 형평 분사도 약화되어 가면서 1930년대 이후 자연스럽게 소멸되었다.

[의의와 평가]

형평사는 창립 취지에서 ‘계급 타파, 모욕적 칭호 폐지, 교육 권장, 상호 친목’ 등을 표방하였다. 당시 백정들이 겪고 있던 사회적 편견과 차별을 철폐하고 인간으로서의 권리와 존엄성을 쟁취하고자 했던 것이다. 순창 형평 운동은 백정의 사회적 지위 향상 및 사회 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 일제 강점기의 중요한 역사적 사건이라 하겠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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