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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성 묘비 이전항목 다음항목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711
한자 韓應聖墓碑
분야 역사/근현대,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비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산133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서홍식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관련 인물 생년 시기/일시 1557년 - 한응성 출생
관련 인물 몰년 시기/일시 1592년 - 한응성 사망
건립 시기/일시 1876년 10월연표보기 - 한응성 묘비 건립
현 소재지 한응성 묘비 현 소재지 -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 산133 지도보기
성격 묘비
관련 인물 한응성(韓應聖)[1557~1592]
재질 화강암
크기(높이,너비,두께) 비신 93㎝[높이]|40㎝[너비]|9㎝[두께]
소유자 청주 한씨 종중
관리자 청주 한씨 종중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있는 개항기에 세운 문신 한응성의 묘비.

[개설]

한응성(韓應聖)[1557~1592]의 본관은 청주(淸州), 자는 경기(景期), 호는 구와(龜窩)이다. 좌익공신(佐翼功臣) 청성군(淸城君) 한종손(韓終孫)의 현손이며, 대호군 한축(韓軸)의 아들이다. 임진왜란에 스승인 조헌(趙憲)이 의병을 일으키자 가산을 정리하여 하인 수십 명을 데리고 합세하였다. 금산 전투에서 선봉이 되어 싸우다가 칠백 의사(七百義士)와 함께 전사하였다. 이때 수행하던 노복 부협(夫脅)은 한응성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에 돌아와 장사를 치른 뒤 자신이 주인을 잘 모시지 못하여 죽게 하였다며 자결하였다. 그 후 타고 갔던 말도 피로에 지쳐 죽었다고 전한다. 한응성의 묘 아래에 부협과 말의 무덤이 있고 이들의 비도 세워져 있다. 한응성은 이조 참의에 증직되고, 정문(旌門)이 내려졌다.

[건립 경위]

한응성 묘비(韓應聖墓碑)는 1876년(고종 13) 10월 10세손인 부호군 한성엽(韓成燁), 한동엽(韓東燁)이 세웠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응성 사망 후 284년 뒤에 세운 것이다. 비문은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 지었으며, 두전(頭篆)은 이병곤(李秉坤)이 쓰고, 내용은 이두범(李斗凡)이 썼다. 1897년 기정진의 손자 기우만(奇宇萬)이 추기(追記)하고, 추기에 11세손 한규학(韓圭鶴)이 글씨를 새겼다고 기록되어 있다.

[위치]

순창읍에서 적성면을 가다가 만나는 국도 21호선에서 순창군 적성면 내월리를 지나 섬진강을 따라 동계면 구미리를 가는 길에 구암정(龜岩亭)이 있다. 구암정에서 오른쪽으로 보이는 산자락 아래 한응성의 묘가 있고, 묘 앞에 한응성 묘비가 세워져 있다.

[형태]

장방형의 화강암 대석(臺石) 위에 화강암의 비신(碑身)을 세우고 역시 화강암의 옥개를 올렸다. 비신이 93㎝ 높이로 비교적 작으며, 너비 40㎝, 두께 9㎝이다.

[금석문]

우측면에서부터 전면에 이르기까지 ‘조선 충신 구와 한공 갈명(朝鮮忠臣龜窩韓公碣銘)’이라고 두전을 새겼다. 본문은 우측면부터 가로 2행, 세로 33자, 전면 가로 10행, 세로 33자, 좌측면 가로 2행, 세로 26자이며, 후면에 가로 10행, 세로 27자의 추기를 새겼다.

비문의 내용은 기정진의 유려한 문체로 “장자에 백이와 도척은 이(理)에 죽고 명에 죽었다는 말이 있으니”로 시작하여 “왜적과 금산의 전투에서 한응성이 조중봉과 더불어 의로 죽었으나 같은 날 유골이 의총에 들어가는 데 섞이지 못함은 다행히 충노(忠奴) 부협이 있었기 때문이다”라고 기록하여 노비가 시신을 수습하여 돌아온 내용을 적었다. 추기는 기우만의 글로 “우측의 명과 병서한 내용은 나의 선조가 쓰신 글로”라고 시작하여 한응성이 순의(殉義)한 사실이 기록된 곳 등을 썼다.

[현황]

묘의 위치가 가파른 산기슭에 있고 비의 크기도 작은 편이다. 비신은 석질이 거칠고 마모가 시작되어 후면 곳곳의 글자가 판독이 어려운 상황이다. 다른 석물은 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이며 다소 초라한 느낌이 들 정도로 간소하다. 청주 한씨 종중에서 소유 및 관리한다.

[의의와 평가]

36세의 젊은 나이로 위기에 처한 나라를 위하여 장렬하게 목숨을 바친 충신의 행적을 새긴 묘비이기에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또한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주인의 시신을 수습하여 고향으로 돌아와 장례를 치르고 자결한 노복의 무덤과 비가 같이 있어 더욱 많은 것을 보여 주는 묘역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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