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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인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939
한자 金麟厚
이칭/별칭 후지(厚之),하서(河西),담재(湛齋),문정(文靖),문정(文正)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전통 시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
집필자 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510년연표보기 - 김인후 출생
활동 시기/일시 1531년 - 김인후 사마시 급제
활동 시기/일시 1540년 - 김인후 문과 급제, 권지승문원 부정자에 제수
활동 시기/일시 1543년 - 김인후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에 제수
몰년 시기/일시 1560년연표보기 - 김인후 사망
추모 시기/일시 1669년 - 김인후 문정(文靖) 추시
추모 시기/일시 1796년 - 김인후 문정(文正)으로 시호 변경, 영의정에 추증, 문묘에 배향
출생지 김인후 출생지 - 전라남도 장성군
거주|이주지 김인후 이주지 - 전라북도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 지도보기
수학|강학지 훈몽재 - 전라북도 순창군 쌍치면 지도보기
묘소|단소 김인후 묘소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
사당|배향지 필암 서원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필암리
사당|배향지 노동 서원 - 남원
사당|배향지 영귀 서원 - 전라남도 곡성군 겸면 현정리
성격 유학자|문관
성별
본관 울산(蔚山)
대표 관직|경력 홍문관 부수찬

[정의]

조선 전기 순창에서 활동한 유학자이자 문관.

[가계]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담재(澹齋). 증조할아버지는 김의강(金義剛), 할아버지는 김환(金丸), 아버지는 김령(金齡)이다. 어머니는 조적(趙勣)의 딸 옥천 조씨이고, 처는 윤임형(尹任衡)의 딸이다.

[활동 사항]

김인후(金麟厚)[1510~1560]는 1510년(중종 5) 장성(長城)에서 출생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청수(淸粹)했으며, 5~6세 때에 문자(文字)를 이해하여 말을 하면 사람이 놀랄 정도였다. 1519년(중종 14) 김안국(金安國)에게서 도학과 문학을 배웠으며, 1531년(중종 26)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하였다. 이황(李滉) 등을 만나 도학을 토론하는 등 교우가 매우 두터웠다.

1540년(중종 35)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승문원 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고, 다음 해에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賜暇讀書)하고, 홍문관 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중종 38)에 홍문관 박사 겸 세자시강원 설서(世子侍講院說書), 홍문관 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책임을 맡아 세자를 가르쳤다. 김인후는 세자의 어질고 현명함을 알아보고 정성껏 가르쳤으며, 세자 또한 스승의 높은 학문과 도덕을 존경하며 잘 따랐다.

1544년(중종 39)에 중종이 세상을 떠나고 세자가 즉위하니 그가 바로 인종이다. 그러나 인종이 즉위 8개월 만인 1545년(인종 1)에 세상을 떠나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김인후는 병을 이유로 고향인 장성으로 돌아갔다. 이후 조정에서 여러 차례 불렀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순창군 복흥면 상송리에 은거하였다. 또한 순창군 복흥면 서마리쌍치면 중안리에 걸쳐 있는 백방산(栢芳山) 아래 훈몽재(訓蒙齋)를 짓고, 이곳에서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사제(私第)에 거처하면서부터는 성현(聖賢)의 학문에 전념하여 조금도 쉬지 않고 사색하고 강구하며 차례대로 힘써서 실천하니, 만년에는 조예(造詣)가 더욱 정밀하고 깊었다. 해서와 초서를 잘 썼고 필적은 기굴(奇崛)하였다. 1560년(명종 15)에 세상을 떠났다.

[학문과 저술]

김인후는 조선 성리학의 이론적 탐구가 심화된 16세기 중반의 대표적인 유학자로 이(理)와 기(氣)에 관한 논쟁의 중심에 있었으며, 태극(太極)에 관한 이론에도 깊어 『천명도(天命圖)』를 완성한 도학자였다. 또한 천문, 지리, 의약, 산수, 율력(律曆)에도 관심이 깊었으며, 아울러 16세기 누정 문학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시인이기도 하였다.

김인후는 호남 가단(湖南歌壇)[호남 지방을 중심으로 자연과 벗하는 풍류 정신의 시조를 창작해 온 사람들]의 핵심적 거점이었던 면앙정(俛仰亭)과 소쇄원(瀟灑園) 등을 찾아가 이곳을 드나들던 기대승(奇大升)[1527~1572], 고경명(高敬命)[1533~1592], 송인수(宋麟壽)[1499~1547], 임억령(林億齡)[1496~1568], 정철(鄭澈)[1536~1593] 등과 두터운 교분을 나누었다. 김인후의 시풍과 풍류는 제자인 정철에게 이어져 강호가도(江湖歌道)로 분류되는 국문 시가가 꽃피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문집인 『하서집(河西集)』과 철학서인 『주역 관상편(周易觀象篇)』, 『서명사천도(西銘四天圖)』, 김인후가 편찬했다고 전해지는 『백련 초해(百聯抄解)』 등이 있으며, 그가 남긴 시 작품은 1,500여 수에 이른다.

[묘소]

묘소는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맥호리에 있다.

[상훈과 추모]

1669년(현종 10)에 문정(文靖)이라 시호하였다. 1796년(정조 20) 시호를 문정(文正)으로 고치고 영의정에 추증하였으며 문묘에 배향하였다. 순창의 화산 서원(花山書院)을 비롯하여 장성의 필암 서원(筆巖書院), 남원의 노동 서원, 옥과[지금의 전라남도 곡성군]의 영귀 서원(詠歸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9.11.19 인명 오류 수정 어머니는 조효근(趙孝謹)의 딸 -> 어머니는 조적(趙勣)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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