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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풍이 살아 숨 쉬는 고장, 순창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2227
한자 儒風-淳昌
분야 종교/유교
유형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전기,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최영성

[순창의 유학 전통과 흐름]

순창은 조선 시대 전라도 지역의 과거 급제자 수가 전주, 남원, 부안에 이어 네 번째로 많았을 정도로 유학의 전통이 오래되고, 뿌리가 깊은 지역이었다. 유학의 전통을 평가하는 기준의 하나로 서원의 건립과 운영을 들 수 있는데, 조선 시대 순창에는 화산 서원(花山書院)[1607년 건립], 무이 서원(武夷書院)[1788년 건립], 지계 서원(芝溪書院)[1788년 건립], 어암 서원(魚巖書院)[1827년 건립] 등 4개의 서원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1868년 흥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 이후 철거되어 현재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유맥(儒脈)과 유풍(儒風)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순창 향교(淳昌鄕校)[1413년 건립]와 훈몽재(訓蒙齋)[1548년 건립, 2009년 중건]를 통해 계승되고 있다.

순창군 유등면 오교리에 있었던 화산 서원(花山書院)신말주(申末舟)·김정(金淨)·김인후(金麟厚)·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박상(朴祥)·유옥(柳沃)·신공제(申公濟)·양사형(楊士衡)·김시서(金時瑞)를 배향하였다.

이 가운데 순창 출신 인물로는 신말주와 그의 손자 신공제, 김인후와 그의 6세손 김시서, 그리고 양사형 등이다. 김정·박상·유옥중종의 비 단경 왕후(端敬王后) 신씨(慎氏)의 복위를 주청할 때 순창 강천산(剛泉山) 삼인대(三印臺)에 관인(官印)을 걸어 놓고 함께 맹세하였다. 이들은 기묘명현(己卯名賢)이요, 당대의 명유이지만 순창의 유학 전통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는지는 알기 어렵다. 의병장으로 유명한 고경명·김천일 역시 마찬가지다.

신말주의 손자인 신공제[1469~1536]는 당대의 대표적인 청백리다. 그는 고향인 순창의 자연을 사랑하였다. 귀래정(歸來亭) 근처에 온진정(蘊眞亭)을 세우고 이계 주인(伊溪主人)이라 자호(自號)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문집이 전하지 않아 학문 연구에 어려움이 있다. 양사형류희춘(柳希春)의 문인으로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켰다. 순창군 적성면 평남리에는 그가 지은 어은정(漁隱亭)이 남아 있다. 『어은 유집(漁隱遺集)』[1권]이 전하지만 시편(詩篇)이 대다수여서 연구에 한계가 있다. 김인후의 5세손 자연당(自然堂) 김시서[1651~1707]는 임진왜란 때 소실된 훈몽재(訓蒙齋)를 ‘자연당’이란 이름으로 복원하였고, 『자연당 유고(自然堂遺稿)』[2권 1책]를 남겼다. 그의 11세손이 초대 대법원장을 지낸 김병로(金炳魯)이다.

화산 서원과 함께 꼽히는 어암 서원(魚巖書院)쌍치면 둔전리 백방산(栢芳山) 아래 훈몽재 곁에 있었다. 1827년(순조 27)에 김인후의 학덕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졌다가 1876년(고종 13) 서원 철폐령에 의해 철거되었다. 배향 인물은 김인후를 비롯하여 송강(松江) 정철(鄭澈), 율곡(栗谷) 이이(李珥), 자연당 김시서 등이다. 순창 유학의 학맥은 순창읍을 중심으로 신말주의 후손과 문인 그룹에 의해 전해진 일맥, 쌍치면복흥면을 중심으로 김인후의 문인·후손들에 의해 전해진 일맥, 그리고 동계면적성면을 중심으로 남원 양씨 양사형 집안을 중심으로 이어진 일맥으로 나눌 수 있다.

화산 서원어암 서원은 순창 유학의 양대 산맥이다. 당색(黨色)으로 보면 대개 서인→노론 계열로 이어졌다. 여기에는 순창 유학의 시조라 할 수 있는 김인후의 영향이 크다. 김인후는 이웃 장성 고을 출신으로 쌍치 훈몽재에서 여러 해 강학하였다. 훈몽재는 1950년 6·25 전쟁 때 소실되었으나 2009년에 전라북도 순창군이 17억 원을 들여 복원함으로써 유학(儒學)과 전통문화의 산실로 거듭났다. 훈몽재는 순창 유학이 살아 있음을 보여 주는 상징물이다.

[순창을 대표하는 유학의 학문과 사상]

1. 김인후

하서(河西) 김인후[1510~1560]는 순창 유학의 시조일 뿐만 아니라 호남 유학을 정초(定礎)한 학자다. 쌍치 훈몽재는 중요한 강학처 가운데 하나다. 이른 나이에 퇴계(退溪) 이황(李滉)과 함께 성균관에서 강학하면서 도의지교(道義之交)를 맺었다. 세자시강원 설서(說書)로 있을 때, 세자[후일 인종]가 그의 명망을 듣고 은우(恩遇)를 매우 중히 하였으며, 그 역시 세자를 지성으로 받들어 보도(輔導)의 임무를 다하였다. 인종이 즉위한 지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나자 이내 벼슬을 버리고 귀향, 두문불출하면서 세상일에 뜻을 끊었다.

김인후이항(李恒)·기대승(奇大升)과 함께 호남의 거유(鉅儒)로 손꼽힌다. 기대승은 그와 토론하면서 계발된 바가 많았으며, 이것을 이황과의 사칠 논변(四七論辨)에서 많이 연술(演述)하였다고 한다. 이황김인후의 식견이 정밀하고 의리(義理)를 논함이 평이하고도 명백함을 들어 높이 평가하였다.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은 신도비에서 ‘집성(集成)’ 두 글자로 김인후의 학문 세계를 기렸다. 정조는 조선의 개국 이래 도학·절의·문장을 겸비한 대표적인 학자로 높이 받들었다. 이황·송시열·정조의 두터운 평가에 힘입어 1796년(정조 20) 학자에게 최고의 영예인 문묘 종사(文廟從祀)의 열(列)에 들었다.

2. 신경준

여암(旅菴) 신경준(申景濬)[1712~1781]은 실학이 꽃을 피우던 시기에 활동하였다. 신말주의 후손으로, 어려서부터 널리 배우기를 좋아하였으며 탐구벽이 있었다. 유가의 경전은 물론 구류 백가(九流百家)[특히 노장(老莊)]에 널리 통달하였으며, 천문·지리·성률(聲律)·의학·복서(卜筮) 등 섭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25세 때 경기도 소사(素沙)로 옮겨 갔고, 30세 때에는 충청도 직산(稷山)으로 이사하여 학문을 계속하였다. 당시에 저술한 『소사 문답(素沙問答)』·『직서(稷書)』는 관물오리(觀物悟理)와 관련된 내용이다. 생활 주변에서 철학의 대상을 찾아 현실적 문제와 연결시키려 한 점에서 실학적 사고의 일단을 엿볼 수 있다. 1744년(영조 20) 다시 순창에 내려와 10년 동안 학문과 저술에 몰두하다가 1754년 문과에 급제, 벼슬이 동부승지에 오르고 제주 목사(濟州牧使)로 치사(致仕)하였다. 벼슬에 나아간 이후로는 청조(淸朝) 문물의 우수성에 심취하여 북학파의 대열에 섰다.

신경준의 연구 업적은 언어·지리 분야가 단연 압권이다. 그는 17세기 이래 발전하였던 실학의 영향을 받아, 자연 과학적 태도와 고증학적 방법으로 조선 후기 지리학을 발전시켰다. 1770년(영조 46) 왕명으로 『동국문헌비고(東國文獻備考)』를 편찬할 때 『여지고(輿地考)』를 담당하였고, 이어 『동국 여지도(東國輿地圖)』와 『팔도 지도(八道地圖)』를 감수(監修) 또는 제작함으로써 영조의 예우를 받았다. 이 밖에도 『도로고(道路考)』·『군현지제(郡縣之制)』·『강계지(疆界誌)』·『산수경(山水經)』 등 역사·지리에 관한 업적들을 남겼다. 그는 문자학·성음학(聲音學)에도 발군의 조예가 있었다. 1750년에 저술한 『훈민정음 운해(訓民正音韻解)』는 훈민정음의 음운 원리를 과학적이고 독창적으로 연구한 업적으로 평가된다.

3. 양응수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1700~1767]는 김인후 이후 단절되었던 순창 성리학의 맥을 이은 18세기 성리학자다. 순창군 적성면 괴정리서림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일생토록 과업(科業)을 멀리하고 위기지학(爲己之學)에 힘썼다. 38세 때 용인의 한천(寒泉)에 있던 도암(陶庵) 이재(李縡)에게 나아가 10년 동안 모시면서 성리학과 예학에 대하여 강론하였다.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하는 동안 당대의 명유 김원행(金元行)·송명흠(宋明欽)·박성원(朴聖源) 등 노론 낙론계(洛論系) 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이재가 세상을 떠나자 1년간 시묘 살이를 하였다. 시묘 살이를 하는 동안 스승의 문집을 엮기 위하여 기본 작업을 진행하였다. 이상영(李商永)은 묘갈명에서 그의 학문에 대해 ‘연원단적(淵源端的) 직접한천(直接寒泉)’이라 하였다. 이는 그가 이재의 의발(衣鉢)을 전해 받은 수제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 당시 낙론계 중요 학자였음을 말하는 것이다.

저술로 『백수집』 30권이 있다. 이 가운데 주요 저술로 『사서 강설(四書講說)』, 『위학 대요(爲學大要)』, 『종주편(宗朱篇)』 등이 있다. 그는 이기설(理氣說)에서는 스승 이재의 설을 계승하였고, 인물성 동이론(人物性同異論)에서는 낙론을 지지하고 호론을 배척하였다. 「이기 설변(理氣說辨)」·「지각 설변(知覺說辨)」·「심기 설변(心氣說辨)」 등은 그의 학문이 정심(精深)함을 보여 주는 논문들이다. 당시 이재의 문하에서 수학한 제현이 많았지만 ‘설성 설리(說性說理)’에서는 모두들 양응수를 추중하여 주문(朱門)의 북계 진씨(北溪陳氏)에 비유하였다고 한다.

4. 기정진

근세 척사위정론(斥邪衛正論)의 거두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은 조선 말기 성리학의 도미(棹尾)를 장식하여 ‘이학 육대가(理學六大家)’의 한 사람으로 꼽힌다. 순창군 복흥에서 태어나 18세 때 장성으로 이사하였다. 헌종 때 경유(經儒)로 천거를 받아 수차에 걸쳐 여러 벼슬이 내려졌으나 대부분 나가지 않았다. 주위 배경이 기호학파와 연결되었지만, 일정한 사승(師承)이 없었던 까닭에 학파적 구속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저술로 문집[40권 20책]이 있다. 이 가운데 「납량사의(納凉私議)」·「이통설(理通說)」·「외필(猥筆)」에 철학 사상이 응축되어 있다. 이 밖에 지구 문인(知舊門人)들과의 문답집인 『답문류편(答問類編)』[15권]이 있다. 문인은 정재규(鄭載圭)·기우만(奇宇萬)·이최선(李最善)·조성가(趙性家) 등 300여 명에 달하여 하나의 학단(學團)을 형성하였다.

기정진은 기호학파의 학맥을 계승하면서도 주리적 관점을 적극적으로 취하였다. ‘주기’의 세폐(世弊)를 구제하겠다는 것이 평소의 신념이었다. 이항로의 문인 김평묵(金平黙)·최익현(崔益鉉) 등은 기정진의 학문과 사상을 매우 높이 평가하였다. 최익현의 경우 “노사 선생은 리 자(理字) 하나만을 짊어지고 복고 반정(復古返正)에 나섰다”고 하면서 “선생의 도학이 높지만 ‘리’자를 주장한 것보다 높은 것이 없으며, 선생의 사공(事功)이 넓지만 양이(洋夷)를 배척한 것보다 큰 것은 없다”고 평하였다.

19세기 후반 조선의 성리학계에는 학파를 초월하여 주리론이 공통적으로 등장하였다. 근기(近畿)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 호남의 노사 기정진, 영남의 한주(寒洲) 이진상(李震相)[1818~1886]이 주리론을 대표하였다. 이들은 서양 문물의 무분별한 유입과 제국주의의 경제적 군사적 침략에 대처하기 위해 성리학의 주리론으로 대응 논리를 개발하였다. 그들의 주리론은 당시 상황에 적용시켜 새롭게 발전시킨 것으로서, 이기를 가치론적 측면에서 해석하여 질서의 안정 및 윤리 강상의 수호, 부식(扶植)에 초점을 맞춘 것이 그 특징이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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