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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우만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0946
한자 奇宇萬
이칭/별칭 회일(會一),송사(松沙)
분야 역사/전통 시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문인·학자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정훈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46년연표보기 - 기우만 출생
활동 시기/일시 1881년 - 기우만 「만인소」 상소
활동 시기/일시 1895년 - 기우만 동학당 토평 비문 지음
활동 시기/일시 1896년 - 기우만 의병 봉기 후 체포
활동 시기/일시 1897년 - 기우만 석방
활동 시기/일시 1908년 - 기우만 순천 조계산 암자에 거주
몰년 시기/일시 1916년연표보기 - 기우만 사망
추모 시기/일시 1980년연표보기 - 기우만 건국 훈장 독립장 추서
출생지 기우만 출생지 -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
사당|배향지 무양사 - 전라북도 순창군 팔덕면 용산리 지도보기
성격 학자|의병장
성별
본관 행주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무양사에 배향된 개항기의 학자이자 의병장.

[가계]

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회일(會一), 호는 송사(松沙). 할아버지는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1798~1879]이다.

[활동 사항]

기우만(奇宇萬)[1846~1916]은 전라남도 장성군 황룡면 아곡리에서 출생하였다. 호남에서 이름 높은 유학자였던 기정진의 뒤를 이어 문유(文儒)로 추대되었다. 1881년(고종 18)에 김평묵(金平默), 이건창(李建昌) 등과 함께 개화 정책을 비난하는 「만인소(萬人疏)」를 올려 호남 소수(湖南疏首)라 불렸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을 당시에는 유생으로서 농민군에 가담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여겼고, 1895년 나주에서 동학당 토평비를 세울 때 비문의 내용을 지었다. 을미사변 후에 전국적으로 단발령이 내려지자 신체 훼손은 큰 불효이니 차라리 머리를 안 깎고 죽는 편이 낫다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

1896년 2월 유림 의병 총 대장인 유인석(柳麟錫)의 격문이 이르자, 광주 향교에 들어가 일제에 맞서는 거사를 의논하고, 기삼연(奇參衍)이 장성의 300여 의병을 이끌고 합류하자 광주의 광산관(光山館)을 본영으로 삼고 의병을 일으켰다. 기우만은 당시 실제적으로 호남 의병의 총수가 되었다. 그러나 고종신기선(申箕善) 등을 선유사(宣諭使)로 보내어 해산할 것을 명하자 이에 따랐다. 5월에 다시 기병하였으나 10월 16일 일본군에게 체포되어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풀려났다. 1908년 순천 조계산의 암자에서 다시 거사를 꾀하려고 모의하던 중에 고종의 강제 퇴위 소식을 듣고 계획을 접었다. 이후에 기우만은 전라남도 장성의 삼성산 삼산재라는 초막에 은거하였다.

[학문과 저술]

『송사집(松沙集)』과 『호남 의사 열전(湖南義士列傳)』이 있다.

[상훈과 추모]

1971년 순창군 팔덕면 용산리 무양사(武陽祠)에 배향되었고, 1980년 건국 훈장 국민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 순창 군지 편찬 위원회, 『순창 군지』(순창군, 1982)
  • 한국 민족 문화 대백과 사전(http://encykorea.aks.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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