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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복남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37
한자 朴福男
분야 문화·교육/문화·예술,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예술인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현대/현대
집필자 황미연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927년 4월 15일연표보기 - 박복남 출생
활동 시기/일시 1996년 - 박복남 전주 대사습놀이 판소리 부문 차상 수상, 서울 전국 판소리 명창 경연 대회 대통령상 수상
특기 사항 시기/일시 1998년 1월 9일연표보기 - 박복남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12호로 지정
몰년 시기/일시 2004년 3월 4일연표보기 - 박복남 사망
출생지 박복남 출생지 -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임동리
학교|수학지 박복남 수학지 - 전라북도 순창군
활동지 여수 국악원 - 전라남도 여수시
활동지 정읍 국악원 - 전라북도 정읍시
활동지 순창 국악원 - 전라북도 순창군
묘소 박복남 묘소 -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국립 임실 호국원
성격 판소리 명창
성별
대표 경력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12호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출신의 판소리 명창.

[개설]

박복남(朴福男)[1927~2004]은 아버지 박춘봉과 어머니 김막동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딸 박미선은 전라북도 도립 국악원 창극단 수석을 거쳐 현재 전라북도 도립 국악원의 판소리 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아들 박종호와 박종훈 역시 국악 연주자로 잘 알려져 있어 그의 소리 맥은 후손에게 고스란히 전승되었다. 중요 무형 문화재 제5호 판소리 「적벽가」 기예능 보유자 박봉술이 사촌 형이다.

[활동 사항]

박복남은 1927년 4월 15일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임동리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의 권유로 초등학교를 졸업한 12세 때부터 박삼룡에게 유성준(劉成俊) 바디[판소리에서 명창이 스승으로부터 전승하여 한 마당 전부를 음악적으로 절묘하게 다듬어 놓은 소리] 「수궁가」를 배우기 시작하였다. 박삼룡은 소리꾼으로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유성준의 제자이자 박복남의 이종사촌 형이다. 박복남은 처음부터 본격적인 소리꾼의 길을 가도록 교육하고자 했던 부친에 의하여 판소리에 입문한 것이다. 또한 14세 때에는 주광덕(朱光德)을 집으로 모셔다가 「흥보가」와 「심청가」를 배웠다. 주광덕은 전라남도 담양 출신으로, 크게 이름을 얻은 소리꾼은 아니지만 전라남도 일원에서 광복을 전후한 시기에 활동하던 서편제 소리꾼이었다.

15세 때에는 당시 전라남도 장흥에 머물고 있던 이동백(李東伯)을 찾아가 단가 두 편을 배웠다고 하는데, 하나는 「경산 경가」로 알려진 것이고, 또 하나는 「인생 수기」라는 곡이다. 「경산 경가」는 일제 강점기부터 유명한 단가로, 현전하는 유성기 음반에도 여러 차례 등장하고 있는 곡이다. 그러나 「인생 수기」라는 단가는 이동백의 창작곡이라고 전한다. 따라서 박복남의 판소리는 유성준·박삼룡으로 이어지는 동편제와 주광덕에게 전수된 서편제, 그리고 이동백에게 배운 중고제(中高制)가 하나로 어우러진 독특한 판소리를 형성하고 있다. 이는 그의 소리 세계가 풍성하다는 말로 귀결될 수 있다.

소리 수업을 마친 박복남은 생계를 위해서 여수 국악원, 정읍 국악원, 부안 국악원, 순창 국악원 소리 선생을 비롯하여 엿장수도 하면서 살았다. 그러나 가장 많이 한 활동은 유랑 극단을 따라다니는 일이었다고 한다. 생계를 위한 고육지책이기는 하였으나 후에 박복남은 유랑 극단, 약장수 등을 따라다녔던 일을 후회하였다고 전한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유성준 바디를 지켜 냈던 박복남은 1970년대 전주 대사습놀이가 부활되었을 때 출전하였지만 탈락하였다.

이후 대회에는 전혀 눈을 돌리지 않았다가, 1995년 70세가 다 된 나이로 전주 대사습놀이에 다시 도전하여 많은 명창들로부터 박수를 받았지만 결선에서 탈락하였다. 이듬해인 1996년 전주 대사습놀이에서 판소리 부문 차상을 받았고, 같은 해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서울 전국 판소리 명창 경연 대회에서 대상인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1997년 『전북 문화 저널』이 주최한 ‘전라도의 춤, 전라도의 가락’의 무대에 올랐고, 1998년 1월 9일 72세의 나이로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12호 「수궁가」 보유자로 지정되었다. 2004년 3월 4일 78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저술 및 작품]

박복남이 보유하고 있었던 유성준 바디의 「수궁가」는 판소리사에서 ‘육지에 온 자라가 토끼를 처음 만나 문답하는 대목’이 유명한 것으로, 『조선 창극사(朝鮮唱劇史)』에 대표적 더늠[판소리에서 명창이 자신의 독특한 방식으로 부르는 어떤 마당의 한 대목]으로 소개되어 있다. 또한 동편제 「수궁가」 특유의 장중하고 온화하면서도 씩씩하고 웅장한 가운데, 그 창법에서 기교를 부리지 않고 선천적인 음량을 소박하게 드러내는 특징을 지녔다. 힘이 있고 거칠면서도 밀고 당기는 소리의 멋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는 평을 듣는다.

[묘소]

전라북도 임실군 강진면 국립 임실 호국원에 안치되어 있다.

[상훈과 추모]

박복남이 훌륭한 소리를 갖고 있으면서도 국악계에 주목받지 못한 이유에 대해 최동현 교수는 “다른 소리꾼들과 별다른 교류가 없었으며, 후에 소리를 그만둔 소리꾼을 스승으로 두었다는 것이 그에게 가장 큰 제약이었다”며 “앞에서 끌어 줄 사람이 없었고, 동문수학한 사람들도 없었으며, 곁에서 도와줄 사람이 없었던 점이 그가 가지고 있는 기량에도 불구하고 인정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된다”고 지적한 바 있다. 유성준 바디의 「수궁가」로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 제2-12호로 지정되었던 박복남유성준의 생애와 많은 부분 유사해 보인다. 이를테면 유성준이 고제(古制) 「수궁가」의 원형을 지켜 온 명창이지만 근대 5명창이었던 김창용·김창환·송만갑·이동백·정정열의 그늘에 가려 제 빛을 내지 못하다가 후대에 그의 소리 세계가 고색창연한 빛을 발휘한 점과 박복남이 70세가 넘어 이른바 명창 반열에 오르고 전라북도 무형 문화재로 지정되어 그의 음악 세계가 열렸다는 점에서 그렇다.

박복남이 간직한 소리 계보를 정리하면 송우룡유성준→박삼룡→박복남으로 이어진다. 순창 판소리사에서 주목되는 것은 박복남의 스승인 유성준이 처삼촌 되는 순창의 장재백으로부터 소리를 배웠고, 구례의 송우룡 문하에서 연마하여 일가를 이루었다는 점에서, 순창 판소리 맥이 박복남에 이르러 절정에 이르렀다고 할 수 있다. 늦게 평가된 소리꾼이지만 진정한 소리로 말년에 꽃피웠던 박복남은 「수궁가」의 원형을 간직하였던 인물로 이름이 높았다. 여러 무대에서 완창 「수궁가」를 녹음하기도 한 박복남은 판소리의 음색이 정아하고 독특하며 고성의 기량이 뛰어날 뿐더러 반평생이 넘게 공을 들인 득음의 경지가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였다. 그는 탄탄한 성음과 치열한 공력으로 동편제·서편제·중고제를 아우르면서 한평생 우리 음악을 지켰던 예인이었다. 또한 순창을 중심으로 소리판을 지켜 낸 진정한 순창의 명창이었다.

[참고문헌]
[수정이력]
콘텐츠 수정이력
수정일 제목 내용
2017.05.04 가족 사항 수정 [개설] "부인 주점자와의 사이에 3남 1녀를 두었는데" 삭제
이용자 의견
추* 가족 사항이 잘못 기재되어 있으니 정정 바랍니다 부인 주 점자는 부인이 아니고 사실혼 관계이고 본 부인은 따로 김옥남 여사가 엄연히 호적에 등재되있고 그 후손으로 아들 다섯이 있으므로 정정을 요구 합니다
꼭 정정하여 주시기를 바랍니다 임실 호국원에 있는 그의 비문을 보시면 증명이 될것입니다
  • 답변
  • 디지털순창문화대전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부인 관련 내용을 삭제하였습니다.
2017.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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