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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현
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051
한자 申甫鉉
이칭/별칭 신보현(申保玄),신보현(申寶鉉),신창학(申昌學)
분야 역사/근현대,성씨·인물/근현대 인물
유형 인물/의병·독립운동가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근대/개항기
집필자 임숙정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출생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신보현 출생
추모 시기/일시 2008년연표보기 - 신보현 애족장 추서
성격 의병장
성별

[정의]

개항기 전라북도 순창 지역을 근거지로 활동한 의병장.

[가계]

신보현신보현(申保玄), 신보현(申寶鉉)으로 한자를 달리 쓰기도 하고, 신창학(申昌學)으로도 불렸다. 가계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활동 사항]

신보현(申甫鉉)[1868~?]은 1868년 출생하였고, 1907년부터 의병을 모아서 왜적과 유격전을 벌이기 시작하였다. 1909년 4월 일본 경찰 보고에 의하면 신보현 의병대는 80명으로 나와 있다. 5월 보고에는 65명, 7월에는 30명, 8월에는 50명, 10월에는 55명으로 되어 있다. 주로 순창을 중심으로 장성·담양·임실·정읍·태인·고부 등지에서 활동하였다. 연대별로 신보현의 활동을 보면, 1908년 봄 장성군 북하면 약수정(藥水亭)에 주둔하고 있던 일본군 13명과 싸웠다. 또 이 무렵 임실군 강진면 갈담에서 일본 군대와 충돌하였으며, 1908년 6월에는 순창군 복흥면 어은에서 활동하기도 하였다.

1909년 2월 15일경 순창군 복흥면 화개산에 거주하는 신보현과 의병장 유종여(柳琮汝)가 백양사의 운문암에서 회합하였다. 3월 3일에는 전라북도 태인 순사 주재소의 보고를 통해 의병장 이성화(李成化)와 노삼문(盧三文) 등이 신보현과 연계하여 중국인으로부터 총기 300정 매입 계약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4월 5일 새벽 1시에는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30명의 의병이 사망하였으며 총 8정도 빼앗겼다. 1909년 6월 7일 전라남도 영광 수비대 보병 2소대와 전라북도 흥덕 수비대 보병 반(半) 소대는, 흥덕 주둔 기병 산구(山口) 특무 조장이 근무지 부임을 위해 오전 9시 고부읍을 출발하여 10시를 지나 서부면 강고리 부근에 이르렀을 때 이곳에 있던 신보현 의병 부대가 나타났다. 이에 일본군은 즉각 전투를 개시하여 신보현 의병대 19명이 사망하였고 의병 4명이 포로로 붙잡혔다.

1909년 6월에는 유공술(柳公述) 등의 부하와 함께 고부군 우일면에서 활동하였다. 1909년 9월 26일 신보현 부대의 부장(部將) 김진화(金振化)가 체포되었으며, 신보현은 1909년 12월 23일 정읍군 동면 석계촌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다. 전라북도 향토 문화 연구회에서 편찬된 『전북 의병사』에는 신보현 부대 의병의 인원과 활동 내역이 정리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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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훈과 추모]

2008년에 애족장이 추서되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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