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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타데이터
항목 ID GC05901320
한자 芝溪書院
분야 종교/유교,문화유산/유형 유산
유형 유적/건물
지역 전라북도 순창군
시대 조선/조선 후기
집필자 이형성
[상세정보]
메타데이터 상세정보
건립 시기/일시 1788년연표보기 - 지계 서원 건립
훼철|철거 시기/일시 1868년연표보기 - 지계 서원 훼철
성격 서원

[정의]

전라북도 순창군 적성면 지북리에 있던 조선 후기 학자 양배, 이유겸, 양사형, 양응수를 모셨던 서원.

[개설]

구암(龜巖) 양배(楊培)는 무오사화와 갑자사화가 일어나자 순창으로 은거하여 아우 양돈(楊墩)과 함께 고기를 낚으면서 세상을 잊고 살았다. 만회(晩悔) 이유겸(李有謙)[1586~1663]은 1639년(인조 17) 순창 군수로 부임하여 선정을 베풀었다. 쌍매(雙梅) 양사민(楊士敏)[1531~1589]은 많은 서적을 섭렵하여 통달하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고 쌍매당(雙梅堂)이라는 정자를 짓고 후진 양성에 주력하였다. 백수(白水) 양응수(楊應秀)[1700~1767]는 벼슬에 뜻을 버리고 오로지 향촌에서 경학과 성리학을 연구하고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위치]

지계 서원(芝溪書院)섬진강 변으로 난 국도 24호선을 따라가다가 적성면으로 들어가면 나오는 지북리 마을에 있었다.

[변천]

지계 서원은 1788년(정조 12) 순창 유림들의 공의(公議)에 의해 양배, 이유겸, 양사민, 양응수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였다. 선현을 향사하며 지방의 유교 교육을 진흥하다가, 1868년(고종 5)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1901년 양배의 유업을 기리기 위해 그의 호를 따서 구암정(龜巖亭)을 세웠으나 서원은 재건하지 않았다.

[형태]

서원이 현존하지 않아 형태를 알 수 없다.

[현황]

현재 지계 서원 터만 남아 있다. 『순창 군지』에는 판서(判書) 조종영(趙鍾永)[1771~1829]이 지은 삼 선생 봉안문(三先生奉安文)이 있고,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1774~1842]가 지은 상량문(上樑文)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 환여 승람(朝鮮寰輿勝覽)』에는 지계사(芝溪祠)로 적혀 있다.

[의의와 평가]

순창군에서 은일한 선비의 사상을 알고 전통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지계 서원은 복원되어야 할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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