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880046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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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尹子雲 |
이칭/별칭 | 지망(之望),낙한재(樂閑齋),문헌(文憲)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인물/문무 관인 |
지역 | 충청남도 보령시 |
시대 | 조선/조선 전기 |
집필자 | 홍제연 |
출생 시기/일시 | 1416년 - 윤자운 출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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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시기/일시 | 1438년 - 윤자운 진사시 입격 |
활동 시기/일시 | 1444년 - 윤자운 식년 문과 병과 급제 |
활동 시기/일시 | 1450년 - 윤자운 집현전 부수찬으로 『고려사』 편찬 참여 |
활동 시기/일시 | 1453년 - 윤자운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0년 - 윤자운 이조참판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2년 - 윤자운 병조판서 제수 |
활동 시기/일시 | 1465년 - 윤자운 의정부 우참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6년 - 윤자운 의정부 좌참찬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7년 - 윤자운 의정부 우찬성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69년 - 윤자운 우의정·좌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0년 - 윤자운 영의정 임명 |
활동 시기/일시 | 1476년 - 윤자운 우의정 임명 |
몰년 시기/일시 | 1478년 - 윤자운 사망 |
추모 시기/일시 | 1494년 - 윤자운 사우 건립 |
묘소|단소 | 윤자운묘소 -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산27 |
사당|배향지 | 문헌사 -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남포방조제로 821-48[관당리 산37-1] |
성격 | 문신 |
성별 | 남 |
본관 | 무송 |
대표 관직 | 영의정 |
[정의]
계유정난 때 공을 세웠으며 후손들이 보령 지역에 세거하고 있는 조선 전기의 문신.
[개설]
윤자운(尹子雲)[1416~1478]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우고, 세조(世祖)[재위: 1455~1468]의 총애를 받아 영의정까지 오른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후손들이 충청남도 보령에 입향하여 번성하였다.
[가계]
본관은 무송(茂松), 자는 지망(之望), 호는 낙한재(樂閑齋)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윤소종(尹紹宗)[1345~1393], 할아버지는 집현전 학사 윤회(尹淮)[1380~1436]이다. 아버지는 윤경연(尹景淵), 어머니는 연안 이씨 이백인(李伯仁)의 딸이다. 윤자운의 증조할아버지 윤소종은 고려 말의 성리학자로 일찍이 자신이 사는 전라도 금산 지역에 유교문화를 전파하였다. 윤소종은 백문보(白文寶)[1303~1374]의 문인이며, 이색(李穡)[1328~1396]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윤자운의 할아버지 윤회는 학문이 해박하였으며 벼슬이 예문관 대제학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도(文度)이다. 윤자운의 아버지 윤경연은 통훈대부(通訓大夫) 사재부정(司宰副正)을 지냈고 증(贈) 영의정 송원부원군에 봉해졌다.
[활동 사항]
윤자운은 1438년(세종 20) 진사시에 입격하였다. 1444년(세종 26)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는데, 사마방목(司馬榜目) 문과방목(文科榜目)에서 당시의 거주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관직 생활을 시작하면서 내직의 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집현전 부수찬(副修撰)으로 있을 때, 『고려사』 편찬에 참여하였고, 1453년(단종 1) 수양대군(首陽大君)이 계유정난을 일으켰을 때에 요속(僚屬)[계급적으로 보아 아래에 딸린 동료]으로 활약하였다.
수양대군이 즉위하자 추충좌익공신(推忠佐翼功臣)이 되어 대호군으로서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를 겸하고, 이어 승정원 동부승지(同副承旨)·도승지(都承旨)에 올랐다. 윤자운은 어머니 상(喪)으로 일시 관직에서 물러났는데, 세조가 여진족의 모련위(毛憐衛)를 정벌할 때에 기복(起復)[어버이의 상중(喪中)에 벼슬자리에 나아감]되어 이조참판이 되었고, 무송군(茂松君)에 봉해져 군사를 지휘하였다. 이후 고위 관직을 역임하는 과정에서 세조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났을때 함길도체찰사(咸吉道體察使)로서 난을 진압하지 못하였지만 세조는 윤자운을 위로하였다. 1469년(예종 1)에 우의정에 올랐다가 곧 좌의정, 영의정으로 거듭 승진하였다. 성종 즉위 후 좌리공신(佐理功臣)이 되어 무송부원군 겸 예조판서(茂松府院君 兼 禮曹判書)에 봉해졌다. 성종(成宗)[재위: 1469~1494] 대 초기에 우의정에 있으면서 공적을 인정받았다. 윤자운의 후손들이 임진왜란 때 충청도 보령에 입향하여 세거하여 왔다.
[묘소]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홍죽리 산27에 윤자운 집안의 묘역이 조성되어 있고 윤자운의 묘 또한 양주시에 있다.
[상훈과 추모]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남포방조제로 821-4[관당리 산37-1]에 있는 문헌사(文憲祠)에서 제향한다. 이 사우(祠宇)는 1494년 경기도 양주군 백석면 홍죽리에 건립되었는데, 관리가 부실해져서 1725년 보령[현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 지역에 사는 윤자운의 후손들이 위패를 모셔와서 재건한 것이다. 충청남도 보령시 웅천읍 소황리에 군사시설이 들어서면서, 1992년 현 위치에 다시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