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0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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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공식명칭 | the Foundation of Wangheungsa Temple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개념 용어/개념 용어(기획)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신리 62-1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양기석 |
[정의]
백제 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세운 원찰.
[왕흥사의 타임캡슐, 마침내 베일을 벗다]
사적 부여 왕흥사지(扶餘 王興寺址)는 부소산 서북쪽 백마강 건너편 울성산성 남쪽, 일명 왕안마을 일대에 있다. 백제 사비 도읍기의 대표적인 가람 터이다. 1934년 ‘王興(왕흥)’ 글자가 새겨진 고려 시대 기와와 석조불좌상, 토기 등이 발견되어 백제 왕흥사일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이후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가 2000~2015년까지 15차에 걸쳐 발굴 조사를 시행하면서 왕흥사의 규모와 범위, 특징과 변화 양상 등이 확인되었다. 2007년 실시한 ‘제8차 왕흥사 터 발굴 조사’에서 왕흥사의 실체가 확인되었다. 조사 결과, 목탑 터, 동서 회랑 터, 부속 건물터, 남북 중심축 선상에 목탑과 금당을 배치한 백제의 전형적인 1탑 1금당식 가람 배치 구조의 형식을 취하고 있었다. 절의 남북 석축의 진입 시설이 확인되어 백제 무왕이 배를 타고 행차하였다는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기록의 사실성을 뒷받침하였다.
출토 유물로는 목탑 심초부에서 출토된 사리장엄구를 비롯하여 금·청동·옥으로 만든 각종 공양구, 연화문 수막새·연목와·소조광배 등 백제 시대의 와전류 등이 확인되었다.
출토 유물을 통하여 왕흥사의 실제 건립 연대와 건립 목적 및 발원자 등이 기록된 사리기가 봉안된 사리장치의 존재를 확인하였다. 사리장치는 현재까지 국내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알려졌다. 아울러 목탑 내 사리구의 봉안 수법과 심초석 조성에 대한 새로운 기법은 물론이고, 출토된 사리 공양구를 통하여 백제 공예의 높은 수준과 국제성을 엿볼 수 있다.
[「왕흥사지사리기」에 담긴 메시지]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많은 유물 중 청동제 사리장엄구에 새겨진 명문은 1,400여 년 동안의 왕흥사의 비밀을 고스란히 타임캡슐에 담고 있다. 사리장치는 왕흥사 목탑 터 심초석의 사리공에서 발견되었다. 사리공에는 외함에 해당하는 석제 장치 안에 내함에 해당하는 청동제 사리함을 넣고, 다시 청동제 사리함 안에 은제병을 넣고, 또 은제병 안에 사리를 넣는 금제 사리병이 있었다. 그러나 금제 사리병 안에서 사리 실물은 발견되지 않았다. 명문이 있는 청동제 사리함은 원통형으로 보주형의 손잡이가 달린 뚜껑이 덮여 있는데, 높이가 10.3cm, 최대 직경이 7.9cm이다. 청동제 사리함 겉면에 사리를 봉안하게 된 연기(緣起)에 관한 일이 음각되어 있다.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글자를 종서(從書)로 써 내려갔는데, 모두 6행에 걸쳐 29자가 새겨져 있다.
丁酉年二月
十五日百濟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
利二枚葬時
神化爲三
명문 판독은 3행 4번째 글자를 ‘三’으로 보는 견해가 있으나 대부분 ‘亡’으로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며, 그 밖에 판독과 해독에는 거의 문제가 없다. 해석하면, “정유년(丁酉年) 2월 15일 [백제]왕 창(昌)이 죽은 왕자를 위하여 찰주(刹柱)를 세웠다. 본래 사리 2매를 묻었을 때 신묘한 변화로 셋이 되어 있었다”가 된다.
명문 안에는 왕흥사와 관련한 몇 가지 메시지가 있다. 첫째, ‘정유년’은 왕흥사의 창건 연대를 알려 주는 중요한 문구이고, 둘째, ‘王昌爲亡王 子立刹本舍’는 절의 발원자가 목탑을 세운 목적을 적었다. 셋째, 석가의 사리가 2개에서 3개로 나누어지는 신이(神異)가 있어났다[利二枚葬時 神化爲三]는 문구에서 위덕왕의 불교적 세계관을 엿볼 수 있다.
[누가 언제 세웠나]
왕흥사 창건을 주재한 발원자는 창왕, 즉 위덕왕이며, ‘정유년 2월 15일’에 죽은 왕자를 위하여 건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정유년 2월 15일은 백제 위덕왕 24년으로 577년 2월 15일에 해당한다. 2월 15일은 석가모니의 열반일인 동시에 미륵보살이 열반한 이후 도솔천에 왕생한 뜻깊은 날이기도 하다. 위덕왕이 불교에서 의미가 있는 날을 택하여 왕흥사의 창건 행사를 성대하게 벌인 것이다.
그런데 왕흥사 창건 시기에 대하여는 논란이 제기되고 있다. 사리장엄구에는 위덕왕 24년으로 되어 있지만, 이와는 달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법왕 2년, 즉 600년에 짓기 시작하여 35년이 지난 무왕 35년인 634년에 가서야 준공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차이를 보인다.
사리장엄구 명문의 ‘입찰(立刹)’은 목탑의 중심 기둥을 세워 탑을 건립한다는 뜻이다. 목탑 이외의 다른 시설들이 설치되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577년 왕흥사에 목탑이 건립되었다고 하면 왕흥사의 공역은 이미 착공된 거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따라서 577년을 왕흥사의 창건 시기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577년 왕흥사에 목탑이 먼저 건립된 것으로 본다면, 600년 법왕과 634년 무왕 때에 걸쳐 왕흥사의 규모 확장과 위상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왕흥사는 고고학적 성과에 의거하여 볼 때, 577년 창건된 부여 능사의 건물 배치와 회랑 터가 유사하다는 점, 왕흥사의 목탑과 다른 건물 유구가 시기적으로 큰 차이가 나지 않는 점, 6세기 후반에 편년되는 기와류가 발견된 점, 백제의 적극적인 후원과 시기적으로 10여 년의 시차밖에 나지 않는 일본의 아스카데라[飛鳥寺] 창건 사례가 참고되는 점 등에서 577년에 창건된 것으로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위덕왕 대에 세워진 왕실의 사찰은 부여 능사와 왕흥사 2개가 확인된다. 부여 능사에서 발견된 국보 부여 능산리사지 석조사리감(扶餘 陵山里寺址 石造舍利龕) 명문에 의하면, 능사의 목탑에 안치된 사리장엄구는 위덕왕 14년인 567년 성왕의 딸이며 위덕왕의 동생인 공주[妹兄公主]의 발원에 의하여 이루어졌다. 부여 능사는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패사한 부왕 성왕의 추복과 극락왕생을 위한 제의의 공간이었다. 부여 능사와 왕흥사의 발원자들은 위덕왕과 공주 모두 성왕계에 속한 왕실 가계의 일원이다. 이런 점에서 왕흥사는 창건 당시에는 왕실의 원찰 성격을 지녔음이 짐작된다. 왕흥사가 ‘국왕의 흥륭을 기원’하는 의미를 가졌다고 한다면, 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추복을 위하여 ‘왕흥(王興)’이란 명칭을 사용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위덕왕 대의 왕흥사는 다른 명칭으로 명명되었을 것이다.
[위덕왕이 사리 봉안식을 주재한 까닭]
위덕왕이 죽은 왕자의 추복을 위하여 왕흥사를 건립하게 된 정치적 의도는 무엇일까? 위덕왕에게는 기록상 확인되는 근친 왕족으로는 동생 혜(惠)와 동생 공주,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태자(阿佐太子)가 있다. 「왕흥사지사리기」를 통하여 알려지지 않은 왕자의 존재가 새롭게 확인된 셈이다.
추복의 대상인 죽은 왕자는 위덕왕이 왕흥사를 세우고 목탑에 불사리를 봉안할 만큼 각별한 애정을 가진 아들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왕자가 위덕왕과는 어떤 관계이며, 어떠한 연유로 언제 죽었는지는 알 수 없다. 죽은 왕자는 위덕왕이 여러 왕자들 중에서 차기 왕위 계승권자로 지목할 정도로 왕실 내에서 큰 비중을 갖고 있었던 적통의 아들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위덕왕은 총애하던 왕자의 죽음을 계기로 장차 왕실의 안위를 염려하여야 할 중차대한 과제를 떠안게 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위덕왕에게는 왕자의 뜻밖의 죽음을 계기로 왕위 계승에서 생길 분란을 미연에 방지하고, 왕족의 결속과 왕권의 기반을 강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위덕왕은 죽은 왕자를 위한 대대적인 추복 행사를 통하여 왕권의 건재함을 대내외적으로 표출하는 방법을 추구하였다. 호불의 군주답게 불교 의식을 거행하여 왕권의 기반을 재확립하는 전기로 삼았다. 죽은 왕자를 위한 목탑과 사원 건립을 위하여 불사리 봉안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는 일에 착수하였다. 사리 봉안식일은 불교에서 성스러운 의미가 있는 2월 15일로 택일하였다. 이런 성스러운 날에 위덕왕이 사리 봉안식을 주관하는 것은 여러 측면에서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하는 데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사리 봉안식은 위덕왕 자신이 사리로 상징되는 석가모니불에 비견되는 존재로 인식될 수 있어 왕권 강화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사리는 교조인 석가모니불을 대신하는 상징적인 유물로 인식될 뿐만 아니라 왕권의 신성성을 강조하는 상징물로 이용되어 온 영물이다. 사리 봉안식은 부처의 송덕을 찬양하는 불교 의식의 제전으로 엄숙하고 경건하게 거행되었으며, 국왕을 비롯하여 대소 신료들과 많은 백성들이 함께하였다. 사리를 봉안하는 사리장엄구뿐만 아니라 여러 진귀한 공양품을 매납하기도 하였다. 공양품 헌납에는 국왕을 비롯하여 왕족과 대소 신료들, 그리고 많은 백성이 참여하여 죽은 왕자의 극락왕생과 자신들의 염원을 기원하였을 것이다. 사리 봉안식을 통하여 국왕과 일체감을 느낀 귀족과 백성들은 부처를 외경하는 마음이 현세의 국왕에 대한 존경심으로 이어졌을 것이다. 이처럼 위덕왕은 사리 봉안식을 주관함으로써 사리로 상징되는 석가모니불에 가탁하여 왕권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다. 아울러 왕권을 정점으로 한 지배 질서를 확립하려는 계기로 삼으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왕흥사 창건의 성격과 의미]
위덕왕의 정치 지향점은 부왕 성왕이 이룬 중흥 정치를 부활하여 권위와 위업을 현창하고 계승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위덕왕이 중흥 정치를 펼치기에는 대내외적 어려움이 산적하여 있었다. 위덕왕은 551년 한강 고토 수복 작전에서 태자의 신분으로 선봉에 서서 고구려와 전투를 벌였다. 554년 관산성 전투에도 주전파의 입장을 견지하면서 최선봉에 나서 신라와 싸우다가 결국 자신으로 인하여 부왕 성왕을 안타까운 죽음으로 내몰았던 일이 있다. 이로써 위덕왕 즉위 초에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출가수도(出家修道)’ 파동이 야기되었을 정도로 어려움을 겪었다. 대성귀족(大姓貴族)들은 패전을 추궁하며 공세를 폈다. 위덕왕에게 성왕의 불의의 죽음은 자책점인 동시에 극복하여야 할 과제였다. 당시 삼국의 정세 또한 백제가 신라와 소강 국면을 맞고 있었으며, 중국 남북조를 대상으로 한 외교전이 치열하게 전개되는 상황이었다.
위덕왕은 이런 대내외적 위기를 돌파할 목적으로 국가 사찰 건립을 계획하였다. 567년에는 부여 능사에 목탑을 건립하여 성왕을 추모하는 사업에 후원하였고, 577년에는 왕흥사를 창건하여 죽은 아들의 추복과 극락왕생을 기원하였다. 위덕왕은 불교식 사리 봉안식을 통하여 부모에 대한 효와 자식에 대한 친자애를 몸소 실천하였다. 유교의 효 사상과 불교 이념이 위덕왕 대에 이르러 백제 왕권을 지탱하게 하는 중요한 정치 이념으로 기능하였다. 예를 정치 이념으로 승화하여 백제의 웅비를 펼치고자 하였던 성왕의 영향에서 비롯되었다.
위덕왕은 호불의 군주답게 많은 사찰 건립을 통하여 국론을 결집시키고, 왕권을 정점으로 한 지배 질서를 확립하는 계기로 삼으려 하였다. 부여 능사를 비롯하여 금강사지, 가탑리 사지, 부여 군수리 사지(扶餘 軍守里 寺址)[사적] 등도 위덕왕 대에 건립된 것으로 알려졌다.
왕흥사 창건은 위덕왕 대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큰 의미를 갖는다. 첫째, 위덕왕이 성왕의 후광에서 벗어나 왕권의 독자적 위상을 확보하여 나가려는 의도를 보여 준다. 둘째, 불교 사상을 이념적 기반으로 삼아 왕권을 강화하려는 위덕왕의 호불 정책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셋째, 백제의 존립과 국제적 위상을 높여 한반도 정세에 탄력적으로 대응해야 하는 대외적인 필요성에서 창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