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0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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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泗沘 遷都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대/삼국 시대/백제 |
집필자 | 김기섭 |
[정의]
538년 백제 성왕이 현재의 충청남도 부여군인 사비로 도읍을 옮긴 사건.
[역사적 배경]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공격을 받아 왕도 한성(漢城)이 함락되고 개로왕(蓋鹵王)과 가족이 몰살하자 다급히 웅진(熊津)으로 천도하였다. 웅진 도읍기 초기에는 제22대 문주왕(文周王)이 재위 3년 만에 암살되고, 뒤이어 13세에 즉위한 제23대 삼근왕(三斤王)도 재위 3년에 갑자기 죽는 등 혼란스러웠으나, 제24대 동성왕(東城王)이 즉위한 뒤 정치·군사적 안정을 되찾았다. 제25대 무령왕(武寧王) 때 왕권을 강화하고 영토와 경제력 및 외교력을 회복하며 다시 강국의 면모를 확보하였다.
그런데 웅진성(熊津城)[현 충청남도 공주시 공산성]의 지리 환경은 군사적 방어력은 높지만 왕궁 시설의 위엄을 갖추기 어려운 한계점이 있었으며, 왕성 바깥 제민천 주변의 저습지에 형성된 도시는 자연재해에 취약하고 도시 확장성도 기대하기 어려웠다. 특히, 도심을 둘러싼 금강과 높은 산들은 귀족들의 생활 공간, 각종 수공업 시설, 농경지 등을 확보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으며, 왕실과 왕도를 지키는 중앙 상비군이 주둔하기에도 옹색하였다.
이에 479년 말에 즉위한 동성왕은 재위 490년과 501년 사비(泗沘) 지역으로 사냥을 다녀오고 가림성(加林城)을 쌓는 등 사비 지역에 관심을 기울였다. 당시 이미 사비 지역으로 천도할 계획을 세우기 시작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천도 계획 수립이 웅진 지역에 기반을 둔 귀족들의 반발을 일으켰으며, 501년 동성왕이 암살되는 원인이 되었다고 해석하기도 한다.
동성왕을 이어 즉위한 무령왕은 여러 차례 고구려군을 격퇴하며 군사적 실력을 과시하고 북방과 남방의 영토를 많이 되찾았으며, 전쟁 중에 사방으로 도망간 유민들을 찾아내 농지에 정착시킴으로써 농업 노동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였다. 더불어 사비 지역에 각종 수공업 생산 시설을 구축하여 웅진 왕도의 배후 도시로 만들었다.
[경과]
백제 제26대 성왕(聖王)은 재위 16년인 538년 봄에 도읍을 사비로 옮기고 나라 이름을 남부여(南扶餘)로 바꾸었는데, 천도 준비와 과정에 대한 기록은 전혀 없다. 다만, 『삼국사기(三國史記)』 및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한원(翰苑)』 등의 역사서에 따르면, 사비 왕도에는 왕성(王城)과 사비성(泗沘城)이 있었는데, 흔히 왕성은 부여 부소산성(扶餘 扶蘇山城)[사적], 사비성은 부여 나성(扶餘 羅城)[사적]으로 추정한다. 부소산성 바깥 남서쪽 기슭에 있는 관북리 유적의 대규모 성토 대지가 7세기에 조성되었으며 부근의 남북대로와 같은 핵심 시설들이 모두 7세기 후에 만들어졌다는 발굴 조사 견해도 있다.
[결과]
성왕이 새로이 왕도로 삼은 사비 지역의 지리 형세는 넓은 저습지형 벌판을 금강(錦江)이 감싸듯 북쪽-서쪽-남쪽으로 흐르고 동쪽은 멀리 계룡산과 대둔산이 가로막는 모습이므로 군사적 방어망을 넓게 형성하면 왕도 방어 체계에 큰 문제가 없었다. 금강 하구 및 바다에서 가까워 선박을 운용하기에도 편리하였다. 이러한 지리적 장점 외에 사비 천도 이유로는 왕권 및 중앙집권적 지배 질서를 강화하고 고구려의 군사적 공세에 대처하기 위해서였다는 견해 등이 제시되었다.
성왕의 사비 천도는 부여계 왕실의 역사 정체성을 확립하고 위상을 높이는 일이었기에 왕족들의 지지를 얻었으며 사씨(沙氏)·목씨(木氏)·연씨(燕氏) 등 신진 정치 세력의 지지 및 협조가 있었으며, 진씨(眞氏)·해씨(解氏) 등 남래 귀족들의 지지를 얻기 위하여 국호를 남부여로 바꾸었다는 견해도 있다.
[의의와 평가]
웅진 왕도에 비하여 사비 왕도는 도시의 구획이 정연하며 성벽이 도시를 둘러싸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왕성과 도시를 둘러싼 외곽 성이라는 점에서 중국 북위(北魏) 낙양성(洛陽城) 등의 영향을 받았으나 백제의 자생적 특징이 많다는 견해가 있다. 왕궁의 위치에 대하여서도 부소산성 안에 있었다는 견해와 지금의 관북리 유적과 부근이 왕궁 터이며 부소산성은 후원이었다는 견해로 나뉜다.
사비 천도 이후 백제는 도성에 시조 구태(仇台)의 사당을 세우고 계절마다 제사 지내는 제사 체계를 세웠으며, 도성 안팎에 불교 사찰을 많이 건립하였다. 도성 내부는 5부(部) 5항(巷)으로 구획하였고, 내관(內官) 12부(部), 외관(外官) 10부의 22부사(部司)를 설치하여 국가 사무를 처리하였으며, 관료들의 위계를 16관등제로 일원화하였다. 지방 행정 조직을 방(方)-군(郡)-성(城)으로 편제하고 군사 거점으로서 5방(方)을 설치하였다. 이러한 일련의 체제 정비를 통하여 성왕은 왕권을 강화하고 정국 주도권을 장악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