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목 ID | GC090004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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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倭寇 侵入 |
영어공식명칭 | Invasion of Japanese pirates |
분야 | 역사/전통 시대 |
유형 | 사건/사건·사고와 사회 운동 |
지역 | 충청남도 부여군 |
시대 | 고려/고려 후기 |
집필자 | 정선용 |
발생|시작 시기/일시 | 1376년 6월 - 왜구 임주 약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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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결 시기/일시 | 1387년 10월 - 왜구 임주 및 홍산현 약탈 |
성격 | 사건|외세 침입 |
관련 인물/단체 | 최영|이성계 |
[정의]
고려 후기 왜구들이 충청남도 부여 지역을 침입하여 약탈한 사건.
[개설]
13세기부터 16세기까지 한국과 중국의 해안 지역에 주로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았던 일본 해적을 총칭하여 왜구(倭寇)라고 한다. 왜구가 고려에 처음 침입한 것은 1223년(고종 10)이다. 이후 1392년(공양왕 4)까지 총 529회에 걸쳐 고려를 침략하였고 이 가운데 충청남도 지역을 침략한 것은 78회에 달하였다. 왜구 침입(倭寇 侵入)은 조선 시대까지 이어졌다.
왜구들은 처음에는 미곡(米穀)을 약탈할 목적으로 조세를 운송하는 조운선(漕運船)이나 세곡미(稅穀米)를 쌓아 두었던 조창(漕倉)이 설치된 해안 지역을 침략하는 데 그쳤다. 그러다가 점차 큰 강이나 육로를 따라 내륙 깊숙한 곳까지 들어와 장기간 체류하면서 전국 각지를 유린하였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의 부여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탈과 관련된 기록에 따르면 1376년(우왕 2)에서 1387년(우왕 13)까지 10여 차례에 걸쳐서 나타나고 있다.
[역사적 배경]
1274년(충렬왕 즉위)과 1281년(충렬왕 7) 두 차례에 걸친 여원 연합군의 일본 정벌 이후 일본은 고려 및 중국과의 공식적인 왕래가 사실상 단절되면서 대륙과의 무역 활동이 어려워졌다. 내부적으로는 일본 전역이 남조와 북조로 나뉘어 내란이 벌어지면서 극심한 식량난까지 겪고 있었다. 중앙 정부의 붕괴로 통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던 규슈[九州] 일대의 왜구들이 고려뿐만 아니라 중국까지 침입하여 약탈을 자행하였다. 고려는 왜구의 침략에 제대로 방어하지 못한 채 남해와 서해의 연안 지방을 중심으로 막대한 피해를 입고 있었다.
[경과]
부여 지역의 왜구 침입은 1376년(우왕 2) 이후 본격화되었다. 1376년 6월 왜구가 임주(林州)[현 부여군 임천면]에 침입하여 약탈을 일삼자 전주도병마사(全州道兵馬使) 유실(柳實)과 지익주사(知益州事) 김밀(金密) 등이 물리쳤다. 그러나 다음 달인 1376년 7월에는 부여를 약탈한 왜구가 공주까지 함락하였다.
왜구 중 일부는 석성[현 부여군 석성면]을 약탈하고 나서 연산현[현 충청남도 논산시 연산면]의 개태사를 도륙하였는데, 당시 양광도원수(楊廣道元帥)였던 박인계(朴仁桂)가 개태사 앞에서 벌어진 왜구와의 싸움에서 전사하였다. 이때 최영(崔瑩)[1316~1388]이 출정을 자청하여 홍산[현 부여군 홍산면]에서 왜구를 크게 격파하였다. 이를 홍산대첩이라고 한다.
이후 부여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탈은 한동안 잠잠하였다. 그러나 1377년(우왕 3) 11월에 왜구는 부여현과 홍산현을 약탈하였고, 1378년 3월과 10월에는 임주와 임주 주변 지역을 약탈하였다. 1380년 7월에는 왜구가 서주(西州)[현 충청남도 서천군]에 이어 부여현과 인근의 여러 군현을 약탈하였다. 공주 계룡산 일대에 침입한 왜구들은 피난 온 부녀자와 아이들까지 죽이거나 포로로 붙잡은 뒤에 다시 홍산과 홍산 인근 지역까지 약탈하였다.
1380년(우왕 6) 8월 양광도원수 김사혁(金斯革)이 임주에서 왜구 46명을 체포하여 참수하였다. 또한 최무선 등이 지휘하는 고려 수군이 금강 하구인 진포에서 왜선 500여 척을 격침시켰다. 이를 진포해전이라고 한다.
1380년 9월에는 이성계가 전라도 지리산 부근 황산에서 왜구를 격퇴하는 황산대첩의 승리를 거두었다. 이성계는 이미 지리산과 해주 방면에서 왜구 토벌에 용맹을 떨친 바 있었다. 이후 부여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략은 한풀 꺾여서 1382년(우왕 8) 2월 임주를 약탈한 뒤 임주·부여·석성을 침략한 것을 제외하고는 한동안 발생하지 않았다.
[결과]
금강 하구를 포함한 서해안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략은 조선 초까지 계속되었지만, 고려 시대에 부여 지역에 대한 왜구의 침략을 보여 주는 기록은 1387년(우왕 13) 10월 임주·한주·서주와 홍산을 노략질한 사실을 끝으로 찾아볼 수 없다. 이는 홍산대첩을 비롯한 진포해전과 황산대첩뿐만 아니라 1389년(창왕 1) 2월 박위(朴葳)가 대마도를 공략하여 왜구의 소굴을 소탕하였던 것도 큰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의의와 평가]
부여 지역에 대한 왜구 침입이 고려 우왕 때 집중된 것은 해안 지역에 대한 약탈에서 내륙 지역에 대한 약탈로 확대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따라서 금강을 따라 부여 지역까지 침입하여 약탈하였던 왜구는 금강 하구에서의 진포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으며 이후 부여 지역에 대한 약탈도 잦아들었다.